안상길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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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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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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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필[絶筆] 절필(絶筆)은 붓을 놓고 기록하지 않는 것으로 공자는 춘추(春秋)를 기록할 적에 노() 나라 애공(哀公) 14년 기린을 잡은 데까지만 서술하고 그 이후는 기록하지 않았다.

절함[折檻] 난간(欄干)을 부러뜨린다는 뜻으로, 신하(臣下)가 임금에게 강경(强硬)하게 간()함을 이르는 말이다. 장우(張禹)는 한()나라 성제(成帝) 때 정승으로 있었던 인물이다. 성제는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할 뿐 아니라 스승으로 존경했다. 그렇기 때문에 장우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고, 비위 사실이 적지 않았지만 아무도 나서서 그의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장우는 점점 안하무인이 되어 모든 사람들을 마음 졸이게 만들었다. 이에 주운(朱雲)이 간신 장우(張禹)를 베어야 한다고 상주(上奏)하자 성제는 열화같이 성을 내며 당장 주운을 끌어내어 목을 치라고 하였다. 그러나 주운은 굽히지 않고 난간에 매달려 그를 끌어내리려는 어사(御史)를 뿌리치는 바람에 난간이 부러졌다. 그는 난간과 함께 땅에 뒹굴면서도 외쳤다. “신의 몸은 어찌되든 좋습니다. 오직 폐하의 성대(聖代)가 걱정이 될 뿐입니다. 부디 명찰하시기를이라 하고 피눈물을 흘렸다. 이 모습을 본 장군 신경기(辛慶忌)가 주운의 편을 들어 지성으로 간하자 왕은 부서진 난간을 고치지 마라. 직간한 신하가 보여 준 충성의 표징으로 아끼고 싶다.”라고 하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고 한다. <漢書 朱雲傳>

절항서[浙杭書] 홍대용(洪大容)이 영조(英祖) 41년에 사신가는 숙부를 따라 연경(燕京)에 갔을 때 절강·항주의 선비인 육비(陸飛엄성(嚴誠반정균(潘庭筠) 등을 사귀고 왔는데, 그 후에도 계속 서신 왕래가 있었다.<湛軒書 外集 杭傳尺牘> 엄부자(嚴夫子육효렴(陸孝廉반향조(潘香祖)는 이들을 말한다.

절해[節該] 이두(吏讀)의 하나로 졋해라 읽는데 문서의 전체 요지(要旨), 핵심적인 내용을 가리킨다.

절해취[折骸炊] 좌전(左傳), ()나라가 초()나라 군사에게 포위를 당하여 성중(城中)에서 자식을 바꾸어 잡아먹고 해골을 쪼개어 불을 때어 밥을 지었다 한 말이 있다.

절혹논감고[節或論甘苦] 자기 비위에 맞으면 좋아하고 맞지 아니하면 싫어하는 감탄고토(甘呑苦吐)의 혐의가 조금 있다고 은근히 풍자한 말이다.

절효[節孝] () 나라의 효자 서적(徐積)의 시호(諡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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