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길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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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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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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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악[莊嶽] 춘추 시대 제() 나라 수도(首都)의 이름으로, 전하여 사람이 많이 왕래하는 번화한 곳을 이른다.

장안교환[長安巧宦] 벼슬살이의 처세에 교묘하여 잘 승진되는 것이다.

장안미[長安米] ()의 백거이(白居易)가 약관 시절에 고황(顧況)이라는 이를 찾아가 인사를 올렸더니 그는 백거이의 성명을 한참 보더니만 하는 말이 장안에는 쌀이 귀해서 살기가 매우 쉽지 않을 것이네.[長安米貴 居大不易]”라고 하였다.<全唐詩話>

장안미[長安米] 장안은 당 나라 때의 서울로, 우리나라의 한양을 뜻한다. 곧 한양에서 벼슬살이만 추구하였다는 것이다.

장안살불오[莊雁殺不嗚] 장안은 장자(莊子) 산목(山木)에 나오는 기러기를 이른다. 장자가 친구의 집을 찾으니 친구는 기뻐하여 종에게 기르는 기러기를 잡아 대접하라 하였다. 종이 하나는 잘 울고 하나는 잘 울지 못하는데, 어떤 놈을 잡아야 합니까?”라고 묻자, 주인이 울지 못하는 놈을 잡아라.”라고 했다는 말에서 온 것이다.

장안세[張安世] 장탕의 아들로 자는 자유(子孺). 장탕의 죽음을 애석히 여긴 무제에 의해 발탁되어 랑()이 되었다가 상서(尙書)의 자리에 올라 힘을 다하여 공무를 수행했다. 그 공으로 상서령(尙書令)이 되고 다시 광록훈(光祿勛)으로 자리를 옮겼다. 소제(昭帝)가 제위에 오르자 우장군(右將軍)과 광록훈(光祿勛)을 역임하며13년 동안 황제를 보좌했다. 원봉 6년 기원전 74, 부평후(富平侯)에 봉해지고 3천 호의 식읍을 받았다. 소제가 죽자 그와 곽광(霍光)은 황음무도한 소제의 동생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폐하고 선제(宣帝)를 세웠다. 그 공으로 장안세는 16백호의 식읍을 더 받았다. 지절 2년 기원전 68년 곽광이 죽자 그는 대사마(大司馬)와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되고 상서(尙書)의 일을 통괄했다. 다음 해에 위장군(衛將軍) 임명되어 장락궁 및 미앙궁, 성문의 경비병과 북군의 총수가 되었다. 선제의 깊은 신임을 받아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할 때 영향력을 발휘했다. 항상 몸가짐을 조심하고 매사에 주도면밀하여 새로운 조령(詔令)이 내려질 때마다 그는 일부러 놀라고 두려운 모습을 하고 부하관원들을 시켜 승상부에 보내 자세한 내막을 알아오라고 시켰기 때문에 공경대신들은 그가 이미 조령을 논의할 때 깊이 참여한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직위는 공후(公侯)에 식읍은 만호에 달했지만 몸에는 항상 검은 물을 들인 옷을 입었으며 부인은 베틀을 몸소 돌렸고 7백 명에 달하는 가동들도 모두 직공등이었지만 또한 그의 부는 곽광을 능가했다. 원강(元康) 4년 기원전 62년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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