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길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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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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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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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邵老] ()의 소옹(邵雍)을 이른다. 역리(易理)에 정통하고, 자기 사는 집을 안락와(安樂窩), 자호를 안락선생(安樂先生)이라고 할 만큼 부귀공명을 초월하여 일생을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宋史 卷四百二十七>

소로[蕭露] 임금으로부터 잔치를 하사받은 것을 이른다. 옛날에 제후(諸侯)들이 주() 나라에 조회하자, 천자(天子)가 사랑과 은혜로써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며 연주한 악가(樂歌)인 시경(詩經) 소아(小雅) 여소(蓼蕭)기다란 저 쑥에 이슬이 농후하게 떨어졌네[蓼彼蕭斯 零露濃濃]”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소로와[邵老窩] 송 나라의 소옹(邵雍)인데, 그는 낙양에 살면서 안빈낙도(安貧樂道)하기로 유명하였다. 세상에서는 그를 강절(康節) 선생이라고 불렀다.

소륵[疏勒] 외로운 산성을 가리킨다. 동한(東漢)의 경공(耿恭)이 단약(單弱)한 병사로 소륵성(疏勒城)을 고수하면서 흉노의 수만 군사를 상대로 온갖 고초를 겪는 속에서 수년 동안이나 절의를 지키며 끝내 사명을 완수한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19 耿邯列傳 附 耿恭傳>

소릉[少陵] () 나라 두보(杜甫)의 별호이다. 소릉은 본래 한 선제(漢宣帝) 허후(許后)의 능인데 그 규모가 선제의 능보다 작았기 때문에 소릉이라고 한 것이다. 두보가 일찍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소릉야로(少陵野老)라고 불렀다.

소릉[昭陵] 당 태종(唐太宗)의 능() 이름이다. 태종은 왕희지의 글씨를 좋아하여 평생에 익힌 나머지, 천하에 흩어진 진적을 모두 수집하여 비부(秘府)에 두고서 자기가 죽거든 순장(殉葬)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었다. 그래서 난정첩(蘭亭帖)을 포함하여 모든 명적이 소릉에 묻히게 되었다.

소릉[昭陵] 소릉은 단종(端宗)의 생묘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으로 안산(安山)에 있었는데, 단종이 죽은 뒤 세조(世祖)의 꿈에 나타나 질책하였다 하여 능을 발굴해서 물가에 이장(移葬)하였다.

소릉[召陵] 지금의 하남성 언성현 동쪽 30리에 소릉채라고 있다. 기원전 656년 초나라의 사자로 온 굴완이 제후의 군과 소릉에서 회맹을 행했다.<춘추 회공 4년조> 사기 진본기에 기원전 311년 진군이 초나라를 공격하여 소릉을 점령했다.<진본기 혜문왕 후원년 14>

소릉[召陵] 지금의 하남성 탑하시(漯河市) 동쪽에 소릉진(召陵鎭)이라고 있다. 기원전 657년 제환공(齊桓公)은 일곱 제후국들의 군사를 규합하여 초나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출정하여 이 곳에 이르렀다가 초나라가 주왕실에 조공(朝貢)하는 조건으로 초성왕(楚成王)과 강화조약을 체결한 후 철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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