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길 시집 - 저 너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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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
❏ 사마주[司馬柱] 진취적으로 뜻을 세워 기필코 공명(功名)을 이루어 보겠다는 마음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한(漢)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처음 장안(長安)에 갈 때 촉도(蜀都)인 성도(成都)의 승선교(升仙橋)를 지나면서 그 기둥에 “대관(大官)이 되어 으리으리한 수레를 타지 않고서는 이 다리를 다시 건너지 않겠다.”고 썼던 고사가 있다. <史記 司馬相如列傳>
❏ 사마지려[司馬知呂] 사마는 사마광(司馬光), 여는 여공저(呂公著)를 이른다. 사마광이 위독했을 때 여공저에게 편지를 보내 이르기를 “내가 내 몸은 의원에게 맡기면 되고, 집안일은 자식에게 맡기면 되지만 나라 일은 맡길 곳이 없어 걱정하다가 지금 공(公)이 맡도록 부탁하오.”라고 하였다. <宋史 卷三百三十六>
❏ 사마참석[司馬鑱石] 아무리 묘를 화려하게 꾸며도 후세 사람이 파헤치니 모두 소용없는 일이라는 뜻이다. 예기(禮記) 단궁상(檀弓上)에 “자유(子游)가 ‘부자(夫子)가 송(宋) 나라에 있을 적에 사마(司馬) 환퇴(桓魋)가 석곽(石槨)을 아름답게 조각하느라고 3년이 되도록 완성하지 못하자 부자가 「이렇게 사치하게 꾸밀 바에야 죽어서 일찍 썩는 것이 낫다.」했다.’고 하였다.”라고 했다.
❏ 사마천[司馬遷] 전한의 역사가이다. 지는 자장(子長). 경칭은 태사공(太史公). 젊었을 때 전국 각처를 주유(周遊)하며 전국 시대 제후(諸侯)의 기록을 수집 정리하였다. 기원전 104년 공손경(公孫卿)과 함께 태초력(太初曆)을 제정하여 후세 역법(曆法)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아버지 사마담(史馬談)의 뒤를 이어 태사령(太史令)이 되었다. 흉노(匈奴) 토벌 중 포로가 되어 투항한 이릉(李陵)장군을 변호하다가 무제(武帝)의 노여움을 사 궁형(宮刑)을 받았다. 기원전 97년 불후의 명저사기(史記)130권을 완성하였다.
❏ 사마희[司馬喜] 전국 때 중산국의 재상으로 사마희(司馬熹)라고도 한다. 원래 송나라 사람이었으나 슬개골이 짤리는 빈형(臏刑)을 받아 도망쳐 중산으로 들어가 재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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