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길 시집 - 저 너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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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
❏ 읍청당[挹淸堂] 읍청은 김부의(金富儀)의 호이다.
❏ 읍청루[挹淸樓] 읍청루는 숭례문(崇禮門) 밖 10리 거리에 있는 용산(龍山) 위에 있다.
❏ 읍취공[挹翠公]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을 말한다.
❏ 응[應] 지금의 하남성 노산현(魯山縣) 동쪽의 고을로 춘추 때 초, 전국 때 한에 속했다가, 후에 진나라에 할양했다.
❏ 응거[應璩] 위 문제(魏文帝) 때의 문장가. 자는 휴련(休璉). 그의 형 응창(應瑒)과 함께 문명이 뛰어났고 특히 풍자에 능했으며, 벼슬이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三國志 應瑒傳>
❏ 응념원유난[應念遠遊難] 어버이 생각을 하리라는 말이다. 논어 이인(里仁)에 “부모가 계실 때에는 멀리 나가서 노닐지 말 것이요, 나가서 놀더라도 반드시 일정한 처소가 있어야 한다.[父母在 不遠遊 遊必有方]”라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 응대여류[應對如流] 흐르듯 응대한다는 의미로 언변이 능수능란하다는 뜻의 고사성어이다. 남사(南史) 서면전(徐勉傳)에 “남조(南朝) 때 사람 서면(徐勉)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집안이 가난했으나 배우기를 좋아했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6세에 이미 제문(祭文)을 지었으며, 18세에 국자생(國子生)이 되었다. 제주(祭酒)는 서면을 두고 ‘보통 사람과 비교할 수 없다.’면서 재상의 기품을 가지고 있다고 칭찬했다. 과연 양(梁)나라의 무제(武帝)가 즉위한 후 서면은 상서좌승(尙書左丞)에 올랐다. 당시의 양나라는 북위(北魏)와 전쟁 중이었으므로 서면이 집에 들어갈 수 있는 날은 한 달에 한두 번 밖에 없었다. 식구들이 서면의 건강을 염려하여 자주 귀가하여 쉴 것을 권하자 서면은 ‘나라를 위하여 가정을 잊었으므로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내가 죽은 후에는 이 일도 전해질 것이다.[吾憂國忘家, 乃至於此. 若吾亡後, 亦是傳中一事.]’라고 말하였다. 서면은 관직에 있으면서 한 번도 자기의 직권을 남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늘 부하들의 수고를 위로하고 공로를 모두 부하들에게 돌렸다. 서면은 선관(選官)의 직책을 열심히 수행하고 인륜 관계를 처리하는 데 조리가 있었으며, 틈나는 대로 문서를 처리했을 뿐만 아니라 사령(응대하는 말)에도 능했다. 집무하는 책상이 공문으로 넘치고 방에 손님이 가득해도 물 흐르듯이 응대했으며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다.[勉居選官, 彜倫有序. 旣閑尺牘, 兼善辭令, 雖文案塡集, 坐客充滿, 應對如流, 手不停筆.]”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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