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길 시집 - 저 너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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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
❏ 읍백[揖白] 집 이름. 광해군 때에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시해하려던 일을 적극 반대한 박승종(朴承宗)의 아들 박자응(朴自凝)은 폐모론(廢母論)에 가담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그는 서궁(西宮) 즉 인목대비를 그리워하는 뜻에서 평소 거처하는 집을 읍백(揖白)이라 이름까지 하였다. 백(白은) 서방(西方)의 빛이니 서궁(西宮)을 가리키고, 읍(揖)은 읍례(揖禮)이니 서궁을 향해 경의를 표한다는 것이다.
❏ 읍사[泣絲] 읍사는 실을 염색하는 것을 보고 울었다는 말이다. 전국 시대 철학자로 겸애설(兼愛說)을 주장한 묵적(墨翟)이 일찍이 실을 염색하는 사람을 보고 울었는데, 그것은 흰 물감을 들이면 희어지고 누른 물감을 들이면 누래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선(善)에 물들면 선하여지고 악에 물들면 악하여지기 때문에 악한 사람을 슬퍼하여 울었던 것이다. <墨子 所染, 淮南子 說林訓>
❏ 읍양[揖讓] 송 태조(宋太組)가 군사들에게 추대(推戴)를 받아 진교역(陳橋驛)에서 군사를 돌려 들어와서, 주(周) 나라 공제(恭帝)에게 양위(讓位)하는 형식으로 나라를 차지하였다.
❏ 읍양[揖讓] 요(堯)가 순(舜)에게 천하를 사양했고, 순(舜)이 우(禹)에게 천하를 사양하였다는 것이다.
❏ 읍옥[泣玉] 초(楚) 나라 사람 화씨(和氏)가 형산(荊山)에서 박옥(璞玉)을 얻어서 여왕(厲王)에게 바치니, 옥공(玉工)이 보고서 옥이 아니라 돌이라고 했다. 왕은 자기를 기만했다 하여, 그 왼쪽 발꿈치를 베었다. 그는 다시 그 옥을 무왕(武王)에게 바치니, 옥공이 보고서 역시 돌이라 했다. 그래서 왕은 그 바른쪽 발꿈치를 베었다. 그 후 문왕(文王)이 즉위하자. 화씨는 그 박옥을 안고 형산 아래서 3주야를 울어서 눈물이 말라 피가 흐를 지경이므로 왕은 사람을 시켜 물으니, 화씨의 말이 “나는 발꿈치가 없어져서 서러운 것이 아니라, 옥을 돌이라 하는 것이 서러워서다.” 하니, 왕은 마침내 옥공을 시켜 그 박옥을 쪼개어 보옥(寶玉)을 얻었다. <韓非子 卞和篇>
❏ 읍옥원[泣玉冤] 전국 때 초(楚)의 변화(卞和)가 큰 옥덩이를 구하여 여왕(厲王)과 무왕(武王)에게 바쳤으나 모두 가짜라 하여 양쪽 발을 베는 형벌을 받았었는데, 뒤에 문왕(文王) 때에야 옥으로 확인되었다.
❏ 읍옥화[泣玉和] 변화(卞和)가 박옥(璞玉) 안고 울다. 큰 포부를 가지고 있으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것에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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