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길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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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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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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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교[王喬] 왕교는 왕자 교()로서 주영왕(周靈王)의 태자이다. 태자 시절에 왕에게 직간하다가 폐해져 서인이 되었다. 그는 젓대를 불어 봉황새 소리를 내었으며 도사(道士) 부구생(浮丘生)을 만나 흰 학을 타고 산꼭대기에서 살았다 한다. <列仙傳>

왕교[王喬] 후한 때 사람으로 신술(神術)이 있었는데, 그가 일찍이 섭현 영(葉縣令)으로 있으면서 매월 삭망(朔望) 때마다 거기(車騎)도 없이 머나먼 길을 와서 조회에 참예하므로, 임금이 그를 괴이하게 여겨 그 내막을 알아보게 한 결과, 그가 올 때마다 오리 두 마리가 동남쪽에서 날아오므로, 그물을 쳐서 그 오리를 잡아 놓고 보니, 바로 왕교의 신발이었다고 한다. <後漢書 卷八十二>

왕교석[王喬舃] 신선들이 신는 신발로, 지방 수령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바, 후한(後漢) 현종(顯宗) 때 하동(河東) 사람 왕교(王喬)가 섭 영(葉令)이 되었는데, 신술(神術)이 있어서 매달 삭망(朔望)에 대궐에 나와 조회에 참석하였다. 황제가 그가 자주 오는데도 수레가 보이지 않는 것을 괴이하게 여겨 태사(太史)로 하여금 몰래 엿보게 하였다. 그러자 태사가 그가 올 때에는 두 마리의 오리가 동남쪽에서 날아온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오리가 오는 것을 보고 그물을 펴서 잡으니, 단지 신발 한 짝만 있었다. <後漢書 卷82上 方術列傳 王喬>

왕교적석[王喬赤舃] 한 명제(漢明帝) 때 상서랑(尙書郞) 왕교(王喬)가 섭현(葉縣)의 수령으로 내려갔다가, 조정에 올라올 적마다 물오리를 타고 오곤 하였는데, 그 오리를 잡고 보니 상서랑 재직시에 하사받았던 신발이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後漢書 方術列傳 王喬傳>

왕기[汪錡] 왕기는 노 애공(魯哀公)의 폐동(嬖童)인데, ()가 노 나라를 침입할 때 애공의 수레에 배승(陪乘)했다가 죽으니, 애공은 나라를 위하여 죽었다 하여 성인(成人)의 예로 빈()을 하였다. 공자는 그것을 잘한 일이라고 칭찬하였다. <左傳 哀公 十一年>

왕길[王吉] 왕길은 한()나라 낭야(琅邪) 고우(皐虞) 사람으로 자는 자양(子陽)인데, 창읍왕(昌邑王) 중위(中尉)로 있을 때 창읍왕이 사냥하길 좋아하여 시도 때도 없이 말을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자, 상소하여 사냥을 그만두고 학문에 힘쓰라는 뜻으로 간하였다. 석오사는 까마귀를 쏘아 잡는 노래라는 뜻이다. 곧 다산이, 왕길이 창읍왕에게 사냥을 그만두라고 간한 뜻을 취해 왕길의 입장에 서서 지은 것이다. <漢書 卷七十二 王吉傳>

왕남전[王藍田] 왕술(王述)을 말한다. ()는 회조(懷祖)이며 산기상시(散騎常侍)상서령(尙書令)을 지냈다. 남전후(藍田侯)를 습봉했기 때문에 왕남전(王藍田)이라 부른다.

왕내사[王內史] () 나라 때 서가(書家)로서 회계내사(會稽內史)를 지낸 왕희지(王羲之)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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