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길 시집

-

저 너머

종이책전자책

 

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반응형

순강실조추[蓴江失早秋] 일찍 벼슬을 떠나지 못했음을 비유한 말이다. () 나라 때 장한(張翰)이 일찍이 낙양(洛陽)에 들어가 동조연(東曹掾)으로 있다가, 어느 날 가을바람이 불어오자 자기 고향인 오중(吳中)의 특산물인 순채와 그곳 오강(吳江)의 농어회가 생각나서 이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卷九十二>

순갱[蓴羹] 진서(晋書) 장한전(張翰傳)()의 문장가 장한은 고향이 오군(吳郡)이었는데, 제왕 경(齊王冏)의 동조연(東曹椽)으로 있다가 가을바람이 불자 갑자기 고향의 명산물인 순채국과 농어회[鱸膾]가 생각나므로 인생이란 자기 뜻에 맞게 사는 것이 좋으니, 무엇 때문에 벼슬에 얽매여 타향에 있겠는가.’ 하고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하였다.

순갱노회[蓴羹鱸膾] () 나라 장한(張翰)이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는 고향의 순채국과 농어회[蓴羹鱸膾]가 생각이 나서 곧장 사직하고 귀향했던 고사가 있다. <晉書 卷92 文苑列傳 張翰>

순거[鶉居] 주거(住居)가 일정하지 않음을 비유한 말이다. ()은 메추라기인데, 이 새는 항상 야거(野居)하여 일정한 곳이 없다.

순경[荀卿] 기원전 313년에 태어나서 238년에 죽은 전국시대 때 사상가이며 교육가이다. 통상적으로 순자(荀子)라 불리며 이름은 황()이다. 조나라 출신으로 나이 50이 넘어 학문을 배우기 위해 제나라에 갔다. 직하(稷下)에 모여있던 학자들은 순경을 장로로 존경했다. 후에 초나라로 가서 춘신군(春申君)에 의해 난능령(蘭陵令 : 지금의 산동성 창산현(蒼山縣)) 난릉진(蘭陵鎭))에 임명되었으나 후에 다시 주위 사람들의 참소를 받고 조나라로 돌아갔다. 조나라는 순경을 상경(上卿)으로 임명했으나 다시 초나라로 돌아가 난능령(蘭陵令)이 되어 그곳에서 저술활동을 하며 생애를 마쳤다. 한나라의 한비자(韓非子)는 이사(李斯)와 함께 동문수학한 순경의 제자다. 순자는 춘추 이후의 각 학파를 모두 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집대성하였다. 그는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의 설을 따라 왕도를 숭배하고 어진 사람을 뽑아 정치를 행하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순자의 학설은 공맹과 많은 차이가 있다. 공자는 인()을 맹자는 인의(仁義)를 주창했으나 순자는 예()가 인간 삶의 기본이라고 했으며, 맹자의 성선설에 반하여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했다. 그는 인간이란 나면서부터 이득을 탐하고 (生而有好利)’ ‘나면서부터 인간의 눈과 귀는 욕망으로 채워져 있다(生而有耳目之欲)’이라고 했다. 그는 성악설에 근거하여 예()와 법()에 의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했으며 인간의 교화를 위해서는 후천적인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의 저서 순자 권학편에 푸른색은 쪽에서 얻어낸 것이지만 쪽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이 언 것이지만 물보다 더차다.[靑取之于藍, 而靑于藍; , 水爲之, 而寒于水], 즉 청출어람(靑出於藍)’라고 했다. 이사(李斯)와 한비자(韓非子)는 동문수학한 순자의 제자들이다.

순경[順卿] 순경은 고려 때의 직신 이존오(李存吾)의 자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