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길 시집 - 저 너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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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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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련[公子戀] 공자는 진천(秦川)의 귀공자(貴公子)였던 왕찬(王粲)을 가리킨다. 왕찬이 한(漢) 나라 말에 난리를 피하여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가서 의지해 있으면서 누각에 올라가 등루부(登樓賦)를 읊어 시름을 달래었는데, 두보의 시 ‘지우(地隅)’에 “상란 당한 진천의 공자요, 슬퍼하는 초 나라 대부로다[喪亂秦公子 悲涼楚大夫]”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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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앙[公子卬] 위혜왕(魏惠王)의 아들이다. 기원전 340년 진나라의 상앙(商鞅)이 군사를 일으켜 위나라를 공격하자 공자앙은 위군(魏軍) 대장이 되어 대항하였다. 그는 상앙과는 어렸을 때부터 일찍이 교분이 있었다. 강화회담을 구실로 상앙의 초청을 받은 공자앙은 주연석상에서 진나라의 군사들에 의해 사로잡히고 그가 이끈 위나라 군사들은 싸움에서 패하고 그 자신은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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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액진채[孔子厄陳蔡] 주경왕(周敬王) 31년 초소왕(楚昭王) 진(珍)이 채(蔡)와 진(陳)나라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던 공자에 관한 소식을 듣고 공자의 일행을 초나라에 초빙하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채와 진 두 나라의 대부들은 공자가 초나라로 가서 중용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군사를 보내어 공자 일행을 포위함으로서 공자와 그 제자들이 양식이 떨어져 매우 곤란한 처지에 노이게 되었던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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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영[公子郢] 위영공의 서자로 자는 자남(子南)이다. 영공에 의해 대부에 봉해졌고 현능하다는 이름이 있었다. 영공의 태자 괴외가 영공의 부인 남자에게 참소를 받아 송나라로 도망치자 영공은 공자영을 그 후계로 삼으려고 했으나 그는 한사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윽고 영공이 죽자 남자가 다시 그를 군주로 세우려고 했다. 이에 공자영은 태자 괴외의 아들 첩(輒)이 있다고 말하여 결국 영공의 뒤는 위출공(衛出公)이 이었다. 그는 완고하게 군주의 자리를 사양했음으로 절조가 있다고 이름이 났으며 당시 사람들은 공자영을 수절[守節)이라고 칭했다. 후에 괴외와 출공이 부자지간임에도 서로 군주자리를 놓고 일어난 내란에서 그는 몸을 피해를 해를 입지 않았다. 시호는 소자(昭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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