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길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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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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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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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회왕[楚懷王] 기원전 328년에 즉위하여 296년까지 재위한 초나라 군주다. 미(羋) 성에 이름은 웅괴(熊槐)이며 초위왕(楚威王)의 아들이다. 집정기간 중, 제나라와 합종을 맺어 진나라의 동진을 막았다. 이에 진혜왕(秦惠王)이 장의(張儀)를 보내 제나라와 절교를 하면 그 댓가로 상오(商於)의 땅 6백리를 할양하겠다고 했다. 상오의 땅을 탐낸 회왕이 제나라와 절교를 하고 사람을 보내 상오의 땅을 받아오게 했다. 그러나 장의는 당시 주기로 한 땅은 6리라고 발뺌을 했다. 분노한 회왕이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를 공격했으나 계속된 싸움에서 많은 군사를 잃고 영토를 빼앗겼다. 진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소왕(昭王)이 회담을 제의하자 무관(武關)에 들어간 회왕은 진나라에 의해 억류되고 말았다. 진나라는 회왕을 협박하여 초나라 땅의 할양을 요구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에 구금된 상태로 있다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탈출에 성공했으나 진나라의 추격군에게 사로잡혀 결국은 환국하지 못하고 진나라에서 병들어 죽었다.

초휴[楚咻] 거센 이론(異論)을 말한다. 맹자(孟子) 등문공하(滕文公下)에 “제 나라 사람 한 명이 가르치고 많은 초 나라 사람이 떠들어대면 매일 매를 때리면서 제 나라 말을 습득하게 하더라도 될 수 없을 것이다.[一齊人傳之 衆楚人咻之 雖日撻而求其齊也 不可得矣]”라고 하였다.

촉[囑] 당부하다. 부탁의 말을 하다.

촉[蜀] 지금의 사천성 성도(成都) 일대를 말한다.

촉각[燭刻] 과시를 급하게 서둘러 보이던 일. 과거는 통상적으로 사방에 알려서 많은 선비들을 모이게 하는 것인데, 그렇지 않고 오직 표전(表箋) 두어 가지만을 가지고 시일(時日)을 한정, 실시하는 것을 촉각이라 한다. 이 제도는 특히 조선조 연산군, 중종 때에 성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촉견폐일[蜀犬吠日] 촉(蜀)나라의 개는 해를 흔히 볼 수 없기 때문에 해만 보면 짖는다. 식견이 좁은 사람이 선하고 어진 사람을 오히려 비난하고 의심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촉군민가고[蜀郡民歌袴] 지방 수령(守令)이 선정(善政)을 하는 데 비유한 말이다. 후한(後漢) 때 염범(廉范)이 촉군 태수(蜀郡太守)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자, 백성들이 “염숙도(廉叔度)여, 왜 이제야 왔소. 전에는 저고리 하나도 없다가 이제는 바지가 다섯 벌이나 된다오.” 하고 그의 선정을 노래하였다. <後漢書 卷三十一 廉范傳>

촉규화시[蜀葵花詩] 접시꽃을 두고 읊은 시. 당(唐) 나라 시인 잠참(岑參)의 촉규화가(蜀葵花歌)가 있다. 그 전시는 “昨日一花開 今日一花開 今日花正好 昨日花已老 人生不得恒少年 莫惜牀頭沽酒錢 請君有錢向酒家 君不見蜀葵花”이다.

촉금[蜀錦] 촉 나라의 비단이란 뜻으로, 촉 나라는 지금의 사천성(四川省)인데 옛날부터 그곳에 좋은 비단이 많이 나므로 이 말이 있게 되었다. <蜀錦譜>

촉노[燭奴] 유사(遺事)에 “신왕(申王)도 사치를 힘썼으니 그때의 유행이 그러하였다. 매일 밤 궁중에서 제왕(諸王)·귀척(貴戚)들과 모여 잔치할 적에는 용단목(龍檀木)으로 동자(童子)를 조각하여 녹의(綠衣)를 입히고 띠까지 띠게 한 다음 화촉(畫燭)을 들려서 좌우에 벌여 세워 놓고 이름을 촉노(燭奴)라 했으므로 제궁(諸宮)·귀척들의 집에서도 다 이를 본받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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