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길 시집 - 저 너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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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
❏ 양효왕[梁孝王] 양 효왕은 두 태후의 막내아들로서 극진한 사랑을 받아 엄청난 호화생활을 하였는데, 사방 3백여 리에 달하는 동원(東苑)과 거대한 궁실들을 연결하는 복도(復道)를 설치했는가 하면, 천자의 정기를 하사받아 출입할 때 감히 천자의 흉내를 내며 행동하기도 하였다. 경제 29년 11월 율태자(栗太子)를 폐하자 두 태후가 양효왕으로 후사를 삼게 하도록 은근히 압력을 넣었는데, 원앙(爰盎) 등 의신(議臣)이 태후를 설득하여 그만두게 한 일이 있었다. 이에 양 효왕이 유감을 품고 원왕 및 의신 10여 인을 때려죽게 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경제가 양 효왕의 모사인 양승(羊勝)과 공손궤(公孫詭)를 죽이는 것으로 마무리지음으로써 “황제가 내 아들을 죽인다.[帝殺吾子]”고 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울던 태후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漢書 卷四十七>
❏ 양효왕[梁孝王] 태어난 해는 확실하지 않고 기원전 141년에 죽은 서한의 제후왕으로 이름은 유무(劉武)다. 한문제(漢文帝)의 아들이고 한경제(漢景帝)의 동모제다. 문제 2년 기원전 178년 대왕(代王)에 봉해지고, 4년 회양왕(淮陽王)으로 개봉되었다. 12년 기원전 168년 양왕(梁王)으로 옮겼다. 경제(景帝) 3년 기원전 154년,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이 발생하자, 그는 중앙군과 협력하여 난을 진압하여 큰 공을 세워 경제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경제의 신임을 과신한 그는 출입 시 항상 황제와 함께 수레를 타고 다녔다. 공을 믿고 자만한 효왕은 봉국에 거대한 궁궐과 후원을 축조하고 널리 금전과 재물을 모아 양나라의 부고의 주옥과 보기는 한나라의 서울보다 더 많았다. 또한 천하의 명사들을 사방에서 불러들여 제인(齊人) 양승(羊勝), 공손궤(公孫詭), 추양(鄒陽) 등을 문하에 두었다. 후에 경제가 태자 율(栗)을 폐하자 태후는 효왕을 그 후계로 삼으려고 했으나 대신 원앙(袁盎) 등의 반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 일로 원한을 품은 효왕은 공손궤 등과 모의하여 원앙 등을 포함한 10여 명의 대신을 자객을 보내 암살했다. 얼마 후에 일이 경제에게 발각되었으나 태후의 비호를 받아 죄를 추궁받지 않았다. 봉국에서 재위 35년 만에 죽었다.
❏ 양효왕[梁孝王] 태어난 해는 확실하지 않고 기원전 141년에 죽은 서한의 제후왕으로 이름은 유무(劉武)이고 한문제(漢文帝)의 아들이고 한경제(漢景帝)의 동모제다. 문제 2년 기원전 178년 대왕(代王)에 봉해지고, 4년 회양왕(淮陽王)으로 개봉되었다. 12년 기원전 168년 양왕(梁王)으로 옮겼다. 양효왕은 동원(東苑)을 짓고 있었는데 그 둘레가 300여 리나 되었다. 또 수양성(睢陽城)을 확대하여 70여 리가 되게 하였다. 크게 궁전을 짓고 복도(複道)를 만들었는데 궁전에서부터 평대(平臺)까지가 장장 30여 리가 되었다. 조정이 하사한 천자의 깃발을 받았으며, 출입하는 관원이 1,000여 수레와 10,000여 마리의 말로 가득하였다. 동서로 수레를 달리며 사냥하며 그 위세가 천자와 같았다. 외출할 때에는 미리 길을 치워 행인을 차단시켰고 돌아와서는 경계를 강화하였다. 사방의 호걸지사 등을 불러들여 효산(崤山) 이동(以東)의 유세객들이 다 왔으니, 제(齊)나라의 양승(羊勝), 공손궤(公孫詭), 추양(鄒陽)등이 바로 그들이다.
❏ 양후[陽侯] 신(海神), 또는 파도신(波濤神)을 말한다. 원래 바다에 인접한 능양국(陵陽國)의 제후였는데, 물에 빠져 죽은 뒤에 큰 파도를 일으켜 사람을 해치는 악귀(惡鬼)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楚辭 九章 哀郢註>
❏ 양후[穰侯] 전국 때 진나라 대신으로 위염(魏冉)의 봉호다. 초나라 사람으로 진소양왕(秦昭襄王)의 모후인 선태후의 이부(異父) 동생이다. 혜왕(惠王), 무왕(武王) 때부터 중책을 맡아 진나라의 정사를 돌봤다. 무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그 형제들이 진왕의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었다. 위염이 소양왕을 진왕의 자리에 올렸다. 소양왕 2년 기원전 305년 무왕의 동생인 서장(庶長) 장(壯)이 반란을 일으키지 위염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진압하고 장(壯)과 그를 따르던 대소 신료와 공족들을 살해하고 무왕의 부인을 위나라로 쫓아냈다. 이후로 위염의 위세는 진나라를 진동시켰다. 소양왕 7년 기원전 300년 진나라의 재상에 임명되었으며 15년 기원전 292년 지금의 하남성 등현(鄧縣)인 양(穰)에 봉해지고 다시 지금의 산동성 정도(定陶)를 더하고 양후(穰侯)라는 봉호를 받았다. 전후로 4번에 걸쳐 진나라의 재상을 역임했으며 한 번은 조나라의 재상을 지냈다. 일찍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세 번이나 위(魏)나라를 공격하여 하내(河內)에 있던 크고 작은 성 60여 개를 점령했으며 위나라에 압박을 가하여 하동(河東)의 땅 400리를 진나라에 바치게 했다. 위나라의 도성 대량성을 포위했으며, 조(趙)와 위(魏) 두 나라 연합군을 화양(華陽 : 지금의 하남성 신정(新鄭) 북)에서 대파했다. 다시 군사를 일으켜 제나라를 공격하여 강(剛)과 수(壽) 등의 땅을 점령하여 그의 봉지인 도읍(陶邑)의 영지를 넓혔다. 백기(白起)를 발탁하여 대장으로 삼았다. 한 때 그의 권력이 강해지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무수히 많았으며 그의 사가의 부는 왕실보다도 더 컸다. 결국은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발호하다가 소양왕 41년 기원전 266년 재상의 자리에 파직되었다. 다음 해 선태후가 죽고 그는 봉읍인 도읍(陶邑)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죽었다.
❏ 양후의[陽侯義] 양후는 늘 풍파(風波)를 일으켜 배를 전복시킨다는 물귀신의 이름이다. 회남자(淮南子) 남명훈(覽冥訓)에 “무왕이 주(紂)를 칠 때 맹진을 건너는데, 양후의 물결이 역류하여 주 나라 군사를 막았다.”고 했는데, 그 주에 “양후는 양릉국(陽陵國)의 제후인데 그가 물에 빠져 죽어 그 귀신이 큰 물결을 일으킨다.”라 하였다.
❏ 양흔[羊欣] 남조(南朝) 시대 송(宋) 나라 서예가. 황로학(黃老學)을 숭상하고 예서(隸書)에 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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