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길 시집 - 저 너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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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
❏ 안락와[安樂窩] 안락와는 낙양현(洛陽縣) 천진교(天津橋) 남쪽에 있는 거실(居室) 이름인데, 송(宋) 나라 때 소옹(邵雍)이 친구들의 도움으로 오대(五代) 시대 주(周) 나라 안심기(安審琦)의 고택(故宅)을 얻어 거처하면서 항상 유유자적하며 안락와라 명명하고 또 안락 선생(安樂先生)이라 자호하였던 데서 온 말이다. <宋史 邵雍傳>
❏ 안렴대[按廉臺] 상산 정상에 있으며 수십 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하는데, 옛날 거란병이 쳐들어왔을 때 삼도(三道)의 안렴사(按廉使)가 이곳으로 피난을 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39>
❏ 안령록[鞍嶺錄] 이괄의 난에 대한 전말을 기록한 사책(史冊)을 말한다. 정충신(鄭忠臣) 등이 안현(鞍峴)에서 이괄의 군사를 대파한 사실을 말한 것이다.
❏ 안류[安榴] 석류(石榴)의 별칭으로, 석류가 본디 안식국(安息國)에서 나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다.
❏ 안리왕[安釐王] 전국 때 위(魏)나라의 군주다. 소왕(昭王)의 아들로 희(姬) 성에 이름은 어(圉)고 양왕(梁王)이라고도 부른다. 즉위 초에 진나라의 공격을 받아 대량이 포위되자 지금의 하남성 온현(溫縣) 일대의 온읍(溫邑)을 바치고 강화를 맺었다. 조나라와 연합군을 결성하여 한나라의 화양(華陽)을 공격했다가 진장 백기의 반격을 받아 13만에 달하는 군사를 잃었다. 위 안리왕은 다시 남양(南陽)의 땅을 진나라에 바치고 강화를 맺었다. 후에 진나라의 침략을 계속 받아 회(懷), 형구(邢丘) 등을 빼앗겼다. 진나라가 다시 방향을 북쪽으로 돌려 조나라를 공격하여 한단을 포위하자 안리왕은 진비(晉鄙)를 대장으로 삼아 구원군을 보냈다. 이에 진나라로부터 위협을 받은 안리왕은 진비에게 행군을 멈추고 업(鄴)에 머무르게 하고 다시 신원연(新垣衍)이라는 유세객을 조왕에게 보내 진나라를 제(帝)로 받들어 그 군사들을 물러가게 하라고 권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의 동생 신릉군(信陵君)이 병부(兵符)를 훔쳐 진비를 죽이고 그 군권을 탈취한 후 북진을 감행하여 진군을 격퇴시키고 조나라를 구했다. 진군을 격파한 여세를 몰아 조군과 함께 왕흘(王齕)이 이끄는 진군을 영신(寧新)에서 대파하고 진나라의 동방진출의 교두보였던 도군(陶郡)을 점령했다. 기원전 253년 위(衛)나라의 멸하여 병탄했다. 진소양왕의 뒤를 이어 새로 진왕의 자리에 오른 장양왕이 대거 위나라를 공격해오자 병부 탈취사건으로 조나라에 망명하고 있던 신릉군을 소환하여 진군을 막게 했다. 제나라를 제외한 다섯 나라의 합종군을 이끈 신릉군은 하외(河外)에서 진군을 대파했다. 이에 신릉군의 위망을 시기한 안리왕은 그로부터의 병권을 빼앗아 신릉군으로 하여금 주색에 빠지게 하여 죽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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