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길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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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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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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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後漢) 순제(順帝)때 장해(張楷)라는 성도(成都) 출신의 학자가 있었다.

평소 거느리는 제자만 해도 100여명 이상이었고 귀족이나 황족들도 수레를 타고 줄지어 찾아왔다. 그는 그것이 싫어 이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먹지 않으면 곤란하므로, 시장에서 한방약을 팔아 돈을 벌면 시골로 들어가서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당시의 포도청장이 그것을 알고 고급 관원의 자격이 있다고 추천했는데, 관원이 되기는 커녕 함곡관(函谷關) 근처의 홍농산(弘農山)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이번엔 그 반대쪽인 화음산(華陰山) 남쪽 기슭으로 숨었으나 그래도 몰려온 사람들로 인해 저자를 이루다시피 붐볐다.

나중에는 화음산 남쪽 기슭에 장해의 자()를 딴 공초(公超)라는 저잣거리가 생겼다고 한다.

이렇게 세상에 나오는 것을 싫어한 까닭은 학자였던 아버지 장패(張覇)가 후한 안제(安帝)의 고문으로 있을 때, 실권을 마음대로 휘둘렀던 황족들과 사귐을 꺼렸던 것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장해는 학문 외에도 도가(道家)의 술법을 좋아해 그것을 연구한 끝에 5리 사방에 자욱하게 안개를 일으킬 수가 있었다.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을 때는 그렇게 해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 당시 배우(裴優)라는 자가 3리 사방에 걸쳐 안개를 일으킬 수가 있어 자만하고 있었는데, 장해에겐 당할 수 없다며 제자로 들어가겠다고 청했다.

그러나 장해는 몸을 피하고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 후 배우는 안개를 일으켜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고 도둑질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취조받을 때 안개를 일으키는 기술을 장해에게서 배웠다고 말해 장해도 2년간 감옥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장해는 옥중에서도 고전을 읽고, 상고의 기록집 상서(尙書), 서경의 주석을 달았다.

이윽고 배우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져 집으로 돌아갔다.

만년에 환제(桓帝)로부터 초빙을 받았으나 역시 병을 핑계로 거절하고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고 한다.

또 정사 삼국지에는 없지만,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는 제갈공명이 사마중달(司馬仲達)과 오장원(五丈原)에서 싸웠을 때, 가끔 안개를 이용해 중달의 군사를 헷갈리게 했다고 한다.

오리무중(五里霧中)’이라 말은 오리무(五里霧)’()’자를 더한 것인데 처음부터 자가 붙어 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후한서(後漢書) 장해전(張楷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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