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길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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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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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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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주[王冑] () 나라 시인. 수 양제(隋煬帝)보다 시가 낫기 때문에 늘 미움을 받다가 그로 하여 해침을 당했다.

왕준[王濬] () 나라 장군. 자는 사치(士治). 홍농(弘農) 사람으로 익주자사(益州刺史)를 지냈으며, () 나라를 치기 위하여 누선(樓船)을 제조, 드디어 오왕(吳王) 손호(孫皓)를 사로잡고 오 나라를 멸하였다. 벼슬이 무군대장군(撫軍大將軍)에 이르렀다. <晉書 王濬傳>

왕중선[王仲宣] 동한(東漢) 사람 왕찬(王粲)의 자. 일찍이 등루부(登樓賦)를 지은 일이 있다.

왕진[王振] 명 나라 영종 때의 환관(宦官)으로, 사례감(司禮監)이 되어 전횡을 하였는데, 영종이 항상 선생(先生)이라고 불렀으며, 공경 대신들이 옹보(翁父)라고 불렀다. 먀선(乜先)이 침입하였을 때 영종을 따라갔다가 토목(土木)에서 전사하였다. 영종이 다시 복위한 뒤에 그를 잊지 못하여 정충사(旌忠祠)를 세웠다. <史略 卷九 英宗獻皇帝>

왕진경[王晉卿] 진경은 송 나라 때 화가로 이름난 왕선(王詵)의 자이다.

왕질[王銍] 송 나라 학자. 자는 성지(性之). 송대(宋代) 고사에 밝았으며, 저서에는 운계집(雲溪集)보시아소명록(補侍兒小名錄) 등이 있다. 일설에는, ‘속잡찬을 왕군옥(王君玉)의 찬이라고도 한다.

왕찬[王粲] 삼국시대 위() 나라 산양(山陽) 사람으로 자는 중선(仲宣)인데, 후한 헌제(後漢獻帝)가 서쪽으로 피신할 때 따라서 장안(長安)으로 갔다가 그곳이 혼란하자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에게 의지하여 15년 동안 지낸 뒤에 조조(曹操)에게 돌아가 승상연(丞相掾)을 지냈다. 널리 배워 아는 것이 많고 문장력이 뛰어났는데, 당시의 학자 채옹(蔡邕)은 그의 재주를 훌륭하게 여겨 올 때마다 신을 거꾸로 신고 나와 마중하였다 한다. 형주에 있을 때 당양현(當陽縣)의 성루(城樓)에 올라가 부[岳陽樓]를 지어 고향을 그리는 시름과 재주를 지니고 때를 만나지 못한 울분을 토로한 것으로 유명하다. <三國志 卷二十一 王粲傳>

왕찬군중시[王粲軍中詩] 삼국 시대 왕찬(王粲)이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의 군막에 의탁하고 있으면서 답답한 심정에 고향을 생각하며 등루부(登樓賦)’를 지었던 고사가 있다. <三國志 卷21 魏書 王粲傳>

왕찬등루[王粲登樓] 삼국(三國) 시대 위()의 왕찬이 동탁(董卓)의 난()을 만나 형주(荊州)에 피난하여 유표(劉表)에게 의지하고 있으면서, 강릉(江陵)의 성루(城樓)에 올라가 고향을 바라보며 돌아갈 것을 생각했던 것을 말한다.

왕찬등루부[王粲登樓賦] 왕찬은 삼국시대 위()나라 산양(山陽) 사람으로 자는 중선(仲宣)인데, 박식하고 문장이 뛰어나 건안칠자(建安七子)중 하나로 꼽힌다. 한 헌제(漢獻帝)때 난리를 피해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15년 동안 의탁해 있다가 조조(曹操)밑으로 들어가 시중(侍中)벼슬까지 지냈는데, 형주에 있을 때 성루(城樓)에 올라가 시사를 한탄하고 고향을 그리는 뜻으로 등루부를 지었다. <文選 卷十一 登樓賦>

왕찬등루한[王粲登樓恨] 왕찬은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하나. 후한(後漢) 말기에 동탁(董卓)의 난()이 일어나자, 그가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에게 의탁, 강릉(江陵) 성루(城樓)에 올랐다가 고향을 그리며 등루부(登樓賦)를 지었다.

왕찬의란[王粲倚欄] () 나라 말에 왕찬(王粲)이 난을 피하여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가서 의지해 있으면서 뜻을 얻지 못함에 누각에 올라가서 등루부(登樓賦)를 읊어 시름을 달랬다. <三國志 魏志 卷21 王粲傳>

왕책[枉策] 굽은 말채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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