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길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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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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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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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연과[燕燕窠] 백거이(白居易)의 감흥시(感興詩)술동이 앞에 유치시킨 건 성성의 피이고, 장막 위에 안일 도모함은 연연의 집이로다.[樽前誘得猩猩血 幕上偸安燕燕窠]”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白樂天後集 卷十三>

연연륵송[燕然勒頌] () 나라 두헌(竇憲)이 흉노를 쳐서 공을 이루고, 반고(班固)를 시켜 글을 지어서 연연산(燕然山)의 돌에 새겼다.

연연명[燕然銘] 후한(後漢) 두헌(竇憲)이 북선우(北單于)의 군대를 크게 격파한 뒤, 연연산에 올라 반고(班固)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하여 기념비를 세우도록 한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23>

연연산[燕然山] 몽고 지방에 있는 산으로, 항애산(杭愛山)이라 불린다. 후한(後漢)의 화제(和帝) 원년(89)에 거기장군(車騎將軍) 두헌(竇憲)이 남선우(南單于) 및 강호(羌胡)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계락산(稽落山)에서 북선우(北單于)와 싸워 크게 승리하여 연연산을 점령하고 돌아왔는데, 그 공적을 기리기 위해 반고(班固)의 솜씨로 명()을 지어 비석을 그곳에 세웠다고 한다. <後漢書 卷二十三 竇憲傳>

연연산[燕然山] 오늘날 몽고의 항애산(杭愛山)이다. 후한 화제(後漢和帝) 때 거기장군(車騎將軍) 두헌(竇憲)과 집금오(執金吾) 경병(耿秉)이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북선우(北單于)를 공격하여 회계산(會稽山)에서 크게 격파하고 연연산에 공적비를 세우고 돌아왔다. <後漢書 卷二十七 竇憲傳>

연연산명[燕然山銘] 후한 때 장군 두헌(竇憲)이 흉노(匈奴)를 정벌하여 크게 승첩을 거두고 연연산에 이르러 반고(班固)로 하여금 그 공업(功業)을 기술하게 한 것을 이른 말인데, 그 문장 이름은 바로 봉연연산명(封燕然山銘)이다. <後漢書 卷二十三>

연연산비문[燕然山碑文] 북방 오랑캐를 크게 격파하고 기념으로 세우는 비문을 뜻한다. 후한(後漢)의 두헌(竇憲)이 북선우(北單于)와 전투를 벌여, 13천 급()을 베고 20여만 명을 포로로 잡는 등 대승을 거둔 뒤, 연연산에 올라 반고(班固)로 하여금 글을 지어 기념비를 세우게 했던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23 竇融傳 附 竇憲傳>

연연산석[燕然山石] 연산은 몽고 지방에 있는 연연산(燕然山)으로, 항애산(杭愛山)이라 불린다. 후한(後漢)의 화제(和帝) 원년(89)에 거기장군(車騎將軍) 두헌(竇憲)이 남선우(南單于) 및 강호(羌胡)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계락산(稽落山)에서 북선우(北單于)와 싸워 크게 승리하여 연연산을 점령하고 돌아왔는데, 그 공적을 기리기 위해 반고(班固)의 솜씨로 명()을 지어 비석을 그곳에 세웠다고 한다. <後漢書 卷二十三 竇憲傳>

연연석[燕然石] 후한(後漢)의 두헌(竇憲)이 흉노(匈奴)를 정벌하고 나서 연연산에 올라가 그 공업을 반고(班固) 하여금 글을 짓게 하여 새겨 놓은 비석이다. <後漢書 竇憲傳>

연연송[燕然頌] 후한(後漢) 때 두헌(竇憲)이 흉노(匈奴)를 정벌하고 연연산에 이르러 비()를 세워서 공업(功業)을 기술할 적에 그를 수행(隨行)했던 반고(班固)가 연연산명(燕然山銘)을 지어 그의 공업을 찬송한 데서 온 말이다.

연연한장명[燕然漢將銘] 후한(後漢)의 거기장군(車騎將軍) 두헌(竇憲)이 흉노를 정벌하면서 계락산(稽落山)에서 선우(單于)를 크게 격파하고는 변새(邊塞)에서 3천 리나 떨어진 연연산에 올라가 돌에 공을 새겼다. <後漢書 卷23 竇融列傳 竇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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