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길 시집 - 저 너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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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
❏ 여분[餘分] 여분은 정통(正統)이 되지 못하고 윤통(閏統)에 해당하는 국가에 대한 폄사(貶辭)이다.
❏ 여분[汝墳] 여수(汝水) 가의 큰 제방을 말한다. <詩經 周南 汝墳>
❏ 여불위[呂不韋] 태어난 해는 미상이고 기원전 235년에 죽었다. 전국시대 때 진(秦)나라의 대신이며 위(衛)나라 복양(濮陽) 사람으로 원래는 지금의 하남성 우현(禹縣)에 있었던 양책(陽翟)의 대상인이었다. 당시 진나라의 공자 이인(異人)이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는 것을 보고 “참으로 기화(奇貨)로다”라고 생각하고 많은 돈을 들여 그와 교우를 맺었다. 이어서 진나라에 들어가 당시 태자였던 안국군(安國君)의 부인인 화양부인(華陽夫人)에게 유세하여 이인(異人)을 그녀의 적자로 삼게 만들었다. 화양부인과 안국군 사이에는 적자가 없었다. 진소양왕(秦昭陽王)이 죽고 안국군이 진왕의 자리에 오르자 이인은 그의 태자가 되었다. 안국군의 시호는 효문왕(孝文王)이다. 효문왕이 소양왕의 상을 치르는 동안 갑자기 죽자 이인이 그 뒤를 이어 진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장양왕(庄襄王)이다. 장양왕은 여불위를 진나라 상국에 임명하고 문신후(文信侯)에 봉하고 그에게 식읍으로 10만호를 내렸다. 장양왕에게는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을 때 낳은 아들이 하나 있었다. 여불위가 자기의 아들을 임신하고 있던 애첩을 장양왕에게 바쳐서 낳은 아들이 바로 후에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이다. 장양왕이 재위 3년만에 죽고 진시황이 즉위하자 여불위는 계속 상국의 자리를 차지하고 진시황은 여불위를 중보(仲父)로 높여 부렀다. 그러나 여불위가 자기의 옛날 애첩이었던 태후에게 천거한 노애(嫪毐)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시황은 그를 연루시켜 상국의 자리에서 파면하고 사천으로 유배 시켰다. 여불위는 사천으로 가던 도중 독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여불위는 진나라의 상국으로 재직 중에 모두 26권으로 된 여씨춘추(呂氏春秋)를 지었다. 여불위가 여씨춘추를 사천으로 유배가서 지었다는 태사공자서의 기술은 잘못이다.
❏ 여붕우교이불신호[與朋友交而不信乎] 증자(曾子)가 하루에 세 가지를 돌아본 것 중의 하나로 “벗과 사귀는 데에 신의로서 하지 않은 것이 있었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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