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길 시집 - 저 너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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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
❏ 양양자시무지기[襄陽自是無知己] 당(唐) 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은 양양(襄陽) 사람이다. 오언(五言)시에 능하였다. 그가 서울에 왔을 때에 왕유(王維)가 내서(內署)에 숙직하면서 그를 청하여 놀았더니, 현종(玄宗)이 창졸에 나오므로 호연이 상 밑에 숨었는데, 현종이 물으므로 왕유가 사실대로 아뢰니 기뻐하여 불러내어 그의 시를 외우라 하였다. 그는 “재주가 없으니 명주가 버리시고, 병이 많으매 친구도 성겨지누나.[不才明主棄 多病故人疏]”란 구를 외우니, 현종이 “경이 짐(朕)에게 구하지 않았었으니 짐이 일찍 경을 버린 적이 없는데.”라고 하면서 놓아보내었다.
❏ 양양제일류[襄陽第一流] 학덕(學德)이 높은 노인을 이른다. 후한(後漢) 때의 은사(隱士)로서 학덕이 높았던 방덕공(龐德公) 등을 양양 기구(襄陽耆舊)라 일컬은 데서 온 말이다.
❏ 양억[楊億] 자(字)는 대년(大年), 건주(建州) 포성(浦城) 사람이다. 그가 천성이 영특하다는 소문을 듣고 태종(太宗)이 11세 된 그를 불러서 비서성 정자(秘書省正字)를 제수하였다. 진종(眞宗)이 즉위한 뒤에는 좌정언(左正言)을 제수하였다. 훗날 그는 전약수(錢若水)와 함께 80권에 달하는 태종실록(太宗實錄)을 편수하는 데 참여하여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였고, 책부원귀(冊府元龜)와 국사(國史)를 편수할 때에도 차례나 체재 등을 모두 그가 정하였다. 벼슬은 호부 낭중(戶部郞中),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고 문장이 화려하여 서곤체(西昆體)라 불렀으며, 대표적인 작품으로 서곤수창집(西昆酬唱集)이 있다. 그 밖에도 편저(編著)한 작품이 매우 많다. <宋史 卷三百五 楊億列傳>
❏ 양엽천[楊葉穿] 전국책(戰國策) 서주책(西周策)에 “양유기(養由基)라는 사람이 활을 잘 쏘는데, 버들잎을 백보(百步) 밖에서 쏘아도 백발백중하였다.”라고 하였다.
❏ 양영몽[兩楹夢]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내가 지난밤 꿈에 두 기둥 사이 마루에 앉아서 궤전(饋奠)을 받았다……. 나는 아마 장차 죽을 것이다.[予疇昔之夜 夢坐奠於兩楹之間……予殆將死也]”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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