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길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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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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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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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거후재[劉郞去後栽] 유랑은 유우석(劉禹錫)을 가리킨다. () 나라 덕종(德宗) 말엽에 유우석이 상서 둔전원외랑(尙書屯田員外郞)으로 있으면서 탄핵을 받아 낭주사마(朗州司馬)로 좌천했다가 헌종(憲宗) 10년에 다시 서울로 불려들어와서 지은 현도관에 놀면서 꽃 구경하는 사람을 읊은 시[遊玄都觀看花君子詩]’자맥에 홍진을 떨치고 오니, 사람마다 꽃 보고 돌아온다 하네. 현도관의 천 그루 복숭아는 다 유랑이 떠난 후에 심었네.[紫陌紅塵拂而來 無人不道看花回 玄都觀裏桃千樹 盡是劉郞去後栽]”라 하였는데, 옛날에 보지 못했던 것을 새로 보게 됨을 읊은 시이다. <舊唐書下 卷一百六十 劉禹錫傳>

유랑거후화[劉郞去後花] 현도관은 당() 나라 때 장안(長安)에 있던 도관(道觀)의 이름이고, 유랑(劉郞)은 바로 당 나라 때의 시인 유우석(劉禹錫)을 이른다. 현도관에는 본디 아무런 꽃도 없었는데, 유우석이 낭주 사마(朗州司馬)로 폄척되었다가 10년 만에 풀려나 돌아와 보니, 그 동안에 어느 도사(道士)가 현도관에 선도(仙桃)를 가득 심어 놓아서 꽃의 화려하기가 마치 붉은 놀[紅霞]과 같았으므로, 유우석이 꽃구경한 제군(諸君)에게 준 시에 장안 거리 붉은 먼지가 얼굴을 스치는데, 사람마다 꽃구경하고 돌아온다 하누나. 현도관 안의 복숭아나무 일천 그루는, 모두가 유량이 떠난 뒤에 심은 거라오.[紫陌紅塵拂來 無人不道看花回 玄都觀裏桃千樹 盡是劉郞去後栽]”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유랑번행[劉郞番行] 유랑은 후한(後漢) 때의 유신(劉晨)을 가리킨다. 명제(明帝) 때 유신이 완조(阮肇)와 함께 천태산(天台山) 도원동(桃源洞)으로 약을 캐러가서 선녀를 만나 함께 살다가 세상에 한번 나온 뒤에 다시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했다 한다. <幽明錄>

유랑삼구[庾郞三韭] 남조(南朝) () 나라 유고지(庾杲之)의 밥상에는 늘 부추로 만든 반찬 세 가지[三韭]만이 놓였는데, 삼구(三韭)가 삼구(三九)와 음이 같은 것에 착안하여 유랑이 어디 청빈하던가, 어채 반찬이 이십칠이나 되는걸.[誰謂庾郞貧 食鮭常有二十七種]”이라고 놀린 고사가 있다. <南齊書 庾杲之傳>

유랑주측반[劉郞舟側畔] 당 나라 유우석(劉禹錫)의 시()파선된 배 옆에 일천 돛대가 지나가고, 늙은 나무 앞에 일만 나무 붐비네.[沉舟側畔千帆過 老樹前頭萬木春]”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불행한 사람의 옆에 득의(得意)한 사람들이 지나간다는 말이다.

유랑현도공독래[劉郞玄都空獨來] 유랑은 곧 유우석(劉禹錫)을 말한다. 당서(唐書) 유우석전(劉禹錫傳)내가 둔전 원외랑(屯田員外郞)으로 있을 적에는 현도관(玄都觀)에 꽃이 없었는데, 낭주 사마(郞州司馬)로 좌천된 지 10년 만에 경사(京師)로 돌아와서 들으니, 도사(道士)가 현도관 주위에 선도(仙桃)를 잔뜩 심었다고 했다. 그 후 다시 지방관으로 좌천되어 있다가 14년이 지나서 다시 현도관을 찾아가 보니, 선도는 한 그루도 없고 아욱과 귀리만 봄바람에 흔들리더라.”고 하였다.

유량[庾亮] ()나라 사람. 자는 원규(元規). 풍골이 준수하고 흥취가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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