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길 시집 - 저 너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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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
❏ 위지[魏志] 중국 진(晉)나라 초기에 진수(陳壽)가 엮은 사서(史書), 삼국지(三國志)의 한 부분이다. 삼국지는 위지(魏志) 30권, 촉지(蜀志) 15권, 오지(吳志) 20권으로 되어 있으며, 위지 30권 중에 동이전(東夷傳)이 들어 있어 한국 고대사의 유일한 사료(史料)가 되고 있다.
❏ 위질[委質] 타국의 신하가 상대국의 군주를 접견할 때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리는 의식에서 나온 말로 귀순(歸順), 신복(臣服)이란 말로 쓰이게 되었다.
❏ 위징[魏徵] 중국 당(唐)나라 초기의 정치가. 자는 현성(玄成). 거록군(鉅鹿郡) 곡양(曲陽) 사람이다. 위징은 어렸을 때 가족을 잃고 가난하여, 출가해서 도사(道士)가 되었다. 617년 이밀(李密)의 부하가 되었으며, 그와 함께 당나라에 항복했다. 621년 이건성(李建成)의 태자세마(太子洗馬)가 되어 이세민(李世民)을 죽이라고 간언했다. 그러나 이세민은 즉위 후 그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벌을 주지 않고 발탁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중용했다. 태종은 항상 위징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원리에 대해 물었는데, 그는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물은 배를 뜨게 해주지만 반대로 전복시킬 수도 있다”라는 비유로 대답했다. 위징의 간언은 태종이 훗날 동아시아의 모든 통치자들에게 모범이 된 ‘정관(貞觀)의 치(治)’를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했다.
❏ 위징비[魏徵碑] 원래 위징(魏徵)은 태자 건성(建成)을 섬겨 태종을 제거하려 하다가 도리어 당태종(唐太宗)의 세력에게 패하여 건성은 살해되고 위징은 잡혔었는데, 태종이 그의 어짊을 알고 신하로 삼았다. 위징이 태종의 재상으로 충간(忠諫)을 좋아하니 태종도 그를 높이 평가하여 위징이 죽자, 몹시 슬퍼하고 손수 비문(碑文)을 지어 세우기까지 하였으나 뒤에 그가 추천한 두정륜(杜正倫)・후군집(侯君集) 등이 죄를 짓자, 위징을 시기하던 간신들은 그가 아당했다고 모함하니 이것을 믿은 태종은 손수 써서 세운 비석을 넘어뜨리기까지 하였다. 그 후 고구려(高句麗)를 정벌하지 말라던 위징의 말을 따르지 않고 출정했다가 실패하자, 그제야 그의 어짊을 깨닫고 탄식하기를 “위징이 만일 살아있었더라면 나로 하여금 이번 걸음이 없게 하였을 것이다.”하고는 즉시 사람을 보내어 위징에게 제사하고 다시 비석을 세웠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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