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길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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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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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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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가리[哀家梨] () 나라 말릉(秣陵) 땅 애중(哀仲)의 집에 배나무가 있었는데 맛이 매우 좋고 크기가 됫박만하여 입에 넣으면 녹아서 그 당시에 애가의 배가 유명하였다.

애걸복걸[哀乞伏乞] 슬프게 빌고 엎드려 빈다는 데서, 갖가지 수단으로 하소연하는 것을 말한다.

애납[艾蒳] 서국(西國)에서 생산된다는 향() 이름이다.

애내곡[欸乃曲] 시가(詩歌)의 이름이다. 애내는 뱃사공들이 노를 저으면서 부르는 노래인데, () 나라 원결(元結)이 이 곡을 지었다.

애릉[艾陵] 현 산동성 치박시(淄博市) 경내 남쪽에 있는 노산(魯山) 서쪽 산록의 고을로 제나라 땅이다. 기원전 489년 오왕 부차가 이 곳에서 제나라 대군을 대파했다.

애릉지전[艾陵之戰] 애릉의 싸움은 전국시대 진나라에 의해 주도된 섬멸전의 전초전에 해당한다. 주경왕 36년 기원전 484년 오()와 노() 연합군이 애릉(艾陵)에서 제군(齊軍)을 크게 물리친 싸움이다. 오나라가 중원의 패자가 되기 위해 그 전해에 노(), (), () 등의 제후국 군대와 제나라를 공격했다. 이와 함께 수군으로 하여금 바다로 나가 제나라를 협공하도록 했으나 제나라의 반격을 받아 싸움에서 패했다. 다음 해, 제나라가 원수를 갚기 위해 노나라를 공격했으나 다시 노군에 의해 패퇴했다. 5월 제나라가 노나라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들은 오왕 부차는 군사를 일으켜 북상하여 노나라 군사와 함께 제군을 공격하여 박()을 함락시키고 계속 진격하여 영()에서 제나라의 주력군과 조우하여 회전에 들어갔다. 쌍방의 병력은 각기 10만에 대체로 비슷한 병력이었다. 이에 오군은 상군, 하군, 우군(右軍) 등 삼군으로 나누어 각기 대부 서문소(胥門巢), 왕자 고조(姑曹), 전여(展如) 등으로 대장으로 삼아 제군과 대치토록 했다. 오왕 부차는 친히 별도의 중군을 친히 지휘하여 오나라 삼군의 후방에 주둔하여 예비대 역할을 했다. 제나라 진영에서는 국서(國書)가 중군을 맡고 고무비(高無丕)가 상군을, 종루(宗樓)가 하군을 지휘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오나라의 우군이 제나라의 상군을 격파했으나 오나라의 상군은 제나라의 중군에 의해 패했다. 이때 오왕이 휘하의 중군을 전투에 투입하여 서문소의 상군을 구원하여 제군을 물리쳤다. 오군은 제나라의 10만에 달하는 군사를 거의 전멸시켰다. 제나라의 장군 공순휘는 싸움 중에 죽고, 하군 대장 종루는 어떻게 전사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국서(國書), 공손하(公孫夏), 여구명(閭丘明), 진서(陳書), 동곽서(東郭書) 등의 대부가 오나라의 포로가 되고 제나라의 병거 800승은 오군에 의해 노획되었다. 애릉의 싸움은 춘추때 가장 큰 규모에 가장 철저하게 상대방 군대를 섬멸한 전투였으며 동시에 중국의 전쟁사 중 최초로 예비대를 운용하여 승리를 일궈낸 전투이기도 했다. 이 싸움 이후로 예비부대의 역할을 병가들이 중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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