悼亡[도망] 죽은 아내를 애도함

 

- 金正喜[김정희] -

 

那將月姥訟冥司[나장월모송명사] 어찌하든 월모 통해 저승에 하소연해

來世夫妻易地爲[내세부처역지위] 내세에는 우리 부부 처지를 바꾸어서

我死君生千里外[아사군생천리외] 내가 죽고 당신이 천리밖에 살아남아

使君知我此心悲[사군지아차심비] 비통한 이 내 심정 당신도 겪게 하리



김정희[金正喜] 예산 출신. 본관은 경주(慶州). 조선(朝鮮) 후기(後期)의 문신(文臣)이며 서법(書法)의 대가(大家). 고증학자(考證學者), 금학자(金石學者), 서화가(書畫家).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 완당(阮堂), 원당(院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과노(果老), 농장인(農丈人),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이다. 순조 19(1819)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예조참의·시강원보덕 등을 지냈다. 순조 30(1830) 생부 김노경(金魯敬)이 윤상도(尹商度)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로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순조의 특별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복직되고, 김정희도 1836년에 병조참판·성균관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헌종 6(1840) 윤상도의 옥사가 재론되면서 다시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어 약 9년간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풀려났다. 철종 2(1851) 헌종의 묘천(廟遷) 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2년 만에 풀려 돌아왔다. 그 후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학예(學藝)와 선리(禪理)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김정희는 박제가(朴齊家)에게 수학을 했고, 24세 때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가서 당대의 거유(巨儒)인 완원(阮元), 옹방강(翁方綱)등과 사귀어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학문에 있어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다. 고증학(考證學)에 뜻을 두어 중국(中國)의 학자들과 문연(文緣)을 맺어 고증학(考證學)을 수입했고, 역대의 명필(名筆)을 연구하여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크게 이루었으며, 특히 예서(隸書), 행서(行書)에는 전무후무한 새 경지를 이룩했다. 금석학(金石學)에도 조예가 깊어, 종래 승() 무학(無學)의 비석이라 했던 북한산 비봉의 비석을 신라(新羅)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임을 고증 단정했다. 서화 작품으로 묵죽도(墨竹圖), 묵란도(墨蘭圖), 세한도(歲寒圖), 모질도(耄耋圖), 부작란도(不作蘭圖) 등이 특히 유명하다. 저서로 완당집(阮堂集),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이 있다.

월모[月姥] 월노(月老). 월하노인(月下老人). 혼인을 관장하는 신인(神人). 부부의 연을 맺어주는 사람.

명사[冥司] 염라대왕이 저승세계를 관장하는 곳. 사람이 죽어서 심판을 받는다는 저승의 법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