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길 시집 - 저 너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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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
江南曲[강남곡] 강남 아가씨
- 鄭夢周[정몽주] -
江南女兒花揷頭[강남여아화삽두] 강남의 아가씨 머리에 꽃을 꽂고
笑呼伴侶游芳洲[소호반려유방주] 방초 모래섬에 벗들과 웃고 놀다
盪槳歸來日欲暮[탕장귀래일욕모] 삿대 저어 돌아오니 뉘엿 해질녘
鴛鴦雙飛無限愁[원앙쌍비무한수] 쌍쌍이 나는 원앙에 마냥 울적해
❍ 정몽주[鄭夢周] 본관은 영일(迎日). 출생지는 영천(永川). 초명은 몽란(夢蘭) 또는 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정운관(鄭云瓘)이다. 어머니 이씨(李氏)가 난초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낳았기 때문에 초명을 몽란(夢蘭)이라 했다. 뒤에 몽룡(夢龍)으로 개명하였고 성인이 되자 다시 몽주(夢周)라 고쳤다. 1360년에는 문과에 합격하였고, 1364년에 여진족 정벌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1372년에는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374년에 성균관 대사성의 벼슬에 올랐는데, 당시 명나라를 배척하고 원(元)나라와 화친하자는 정책에 반대하여 원나라와의 외교 단절을 주장하다가 1376년 언양으로 귀양 갔다. 1377년에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 규슈에 건너가, 왜구의 침략을 항의하고, 잡혀 있던 고려 백성 수백 명을 데리고 왔다. 1380년 조전원수로 있으면서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왜구를 토벌하였고, 1384년 정당문학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긴장 상태에 있던 외교 관계를 회복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여러 벼슬을 거쳐 1389년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恭讓王)을 왕으로 세웠다. 1392년에 조준(趙浚)과 정도전(鄭道傳) 등이 이성계를 왕으로 모시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고 끝까지 고려 왕조를 지키려다가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李芳遠)의 수하에게 살해당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당시 고려의 주자집주(朱子集註)에 대한 정몽주의 강설이 사람의 의표를 찌를 정도로 뛰어나 모두들 놀라워했다. 그러다가 송나라 유학자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四書通)이 전해지면서 그 내용이 정몽주의 강설내용과 서로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고 모두 탄복하였다고 한다. 정몽주의 시문은 호방하고 준결하며 시조 단심가(丹心歌)는 정몽주의 충절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후세에까지 많이 회자되고 있다. 문집으로 포은집(圃隱集)이 전하고 있다.
❍ 방주[芳洲] 방초(芳草)가 무리 지어 피어 있는 작은 모래톱을 이른다. 굴원(屈原)의 초사(楚辭) 구가(九歌) 상군(湘君)에 “저 방주(芳洲)에서 두약을 캐니 장차 하계의 여자에게 주리라.[采芳洲兮杜若, 將以遺兮下女.]”라고 보인다. 두약(杜若)은 향초(香草)의 이름이다.
❍ 탕장[盪槳] 노를 젓다. 상앗대를 젓다. 장은 상앗대. 盪(탕)은 蕩(탕), 蘯(탕)으로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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