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길 시집 - 저 너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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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
❏ 유무[劉戊] 초왕(楚王)으로 시봉된 유교(劉交)의 손자로 상중에 궁녀를 범하여 그 죄로 봉지의 일부인 동해군(東海郡)을 빼앗겼다. 이에 불만을 품고 오왕(吳王) 유비(劉濞)와 함께 오초칠국의 난을 주도하였으나 싸움에 패하여 자살했다.
❏ 유문[留門] 열어둘 때가 아닌데도 대궐문을 열어두는 일. 대궐문은 으레 초혼(初昏)에 닫았다가 날이 새면 여는 것인데, 나갈 자가 다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열어둘 때가 아닌데도 계속 열어 두는 것을 이른다.
❏ 유미암[柳眉巖] 미암은 유희춘(柳希春)의 호이다. 그는 명종(明宗) 2년(1547)에 양재역 벽서 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곧바로 종성(鍾城)으로 유배되었는데, 종성에서 19년 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선조(宣祖)가 즉위한 뒤에는 유배에서 풀려나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특히 경연관으로 오랫동안 있으면서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다.
❏ 유민도[流民圖] 떠도는 백성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송 나라 희령(熙寧) 6년에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이 실현되자 진사(進士) 정협(鄭俠)이 수차 글월을 올려 그 피해를 지적했으나 답이 없었다. 그 후 정협은 고을을 맡아 나갔는데 때마침 가뭄이 심하여 많은 백성들이 수척할대로 수척한 몰골로 수심에 싸여 떠돌아다녔고, 자기 고을 백성들은 끼니 분별을 못하면서도 기와를 짊어지고 옷을 걷고 물을 건너와 관가의 빚 갚는 일에 땀을 흘리고 있었으므로 정협은 그것들을 모두 그림으로 그려 올렸다. 그 그림을 본 신종(神宗)은 크게 뉘우치고 드디어 자책(自責)의 조서를 내리고 청묘법(靑苗法)을 모두 폐지하였던바, 즉시 단비가 내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림을 세상에서는 유민도(流民圖)라고 했다고 한다. <宋史 卷三百二十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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