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길 시집 - 저 너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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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
❏ 유경[劉敬] 원래는 루(婁) 씨로 제나라 출신이다. 고조 5년 기원전 202년 낙양의 유방을 알현하고 그 수도를 장안으로 옮길 것을 건의했다. 유방이 그 안을 받아들여 그 공으로 유씨 성을 하사했다. 그는 유방에 의해 낭중(郎中)에 임명되고 봉춘군(奉春君)이라는 호를 받았다. 후에 관내후(關內侯)로 승진되어 건신후(建信侯)에 봉해졌다. 유방이 흉노와의 싸움에 패하고 후퇴한 성안에서 겹겹이 포위되어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는 한나라 황실의 여자를 흉노의 선우에게 시집보내 강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방이 그를 흉노에게 사자로 보내 화친을 청하고 강화를 맺음으로써 한나라와 흉노와의 관계는 우호적이 되었다. 이에 다시 육국의 귀족 자제들과 후손들을 모두 관중으로 옮겨 살게 하여 지방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史記列傳 劉敬叔孫通列傳>
❏ 유경[遺經] 유경은 공자가 찬(贊)한 주역(周易)을 말한다.
❏ 유경행[庾景行] 경행은 유고지(庾杲之)의 자이다.
❏ 유고[劉賈] 한고조 유방(劉邦)의 사촌형이다. 한고조 밑에서 장군의 신분으로 종군했다가 기원전 201년 형왕(荊王)에 봉해졌다. 후에 반란을 일으킨 영포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 유고공[有故公] 유고공은 바로 노 정공(魯定公)을 이른다. 노 소공(魯昭公)이 건후(乾侯)에 있다가 지난해에 객사(客死)하여 금년 6월에야 시신이 노나라에 들어왔으므로, 춘추(春秋) 경문(經文)에서 정월 즉위(正月卽位)를 쓰지 않았는데, 곡량전(穀梁傳)에서 정공에게 정월 즉위를 쓰지 않은 것은 곧 소공의 상차가 아직 밖에 있어 유고(有故)한 임금이기 때문이었다고 해석한 데서 온 말이다. 자세한 것은 곡량전(穀梁傳) 정공(定公) 원년(元年)에 보인다.
❏ 유고피맹[襦袴疲氓] 한 나라 염범(廉範)이 촉군 태수(蜀郡太守)로 있을 때에 도시에 집들이 서로 다닥다닥 붙었기 때문에 화재가 자주 나므로, 전의 태수는 영을 내려 밤에 불을 켜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여자들이 밤에 길쌈을 하지 못하여 매우 불편하게 여겼다. 염범이 와서는 다만 방화(防火)할 물만 준비하게 하고 불 켜는 것을 허락하였더니 백성들이 기뻐하여 노래를 부르기를 “전에는 홋옷도 없더니 지금은 바지가 다섯 개 씩이나 되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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