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길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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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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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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漁翁[어옹] 늙은 어부

 

- 柳宗元[유종원] -

 

漁翁夜傍西巖宿[어옹야방서암숙] 서쪽 벼랑에 배 대고 잔 늙은 어부

曉汲淸湘燃楚竹[효급청상연초죽] 새벽 맑은 강물 길어 대를 때 밥 짓네

日出不見人[연소일출불견인] 연기 걷고 해 돋아도 사람 볼 수 없고

欸乃一聲山水綠[애내일성산수록] 노 젓는 한 소리에 강과 산은 푸르러

回看天際下中流[회간천제하중류] 중류로 내려가며 하늘가를 둘러보니

巖上無心雲相逐[암상무심운상축] 벼랑 위엔 무심한 구름만 오락가락

 


유종원[柳宗元] ()나라 덕종(德宗)헌종(憲宗) 때 사람으로 중당기(中唐期)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문장가이다. ()는 자후(子厚)이고, 하동(河東) 사람이라 하여 유하동(柳河東), 유주자사(柳州刺史)를 지냈다하여 유유주(柳柳州)로도 불렸다. 하동(河東: 산서성山西省)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나, 장안(長安: 섬서성陝西省)에서 출생하여 자라났다. 소년시대부터 신동이라는 소문이 자자하였고, 스물한 살 때 진사에 급제, 5년 후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도 합격하였다. 벼슬은 감찰어사(監察御史)영주사마(永州司馬)유주자사(柳州刺史)를 역임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 한유(韓愈)유우석(劉禹錫) 등과 친교를 맺었다. 혁신적 진보주의자로서 왕숙문(王叔文)의 신정(新政)에 참여하였으나 실패하여 변경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좌절과 13년간에 걸친 변경에서의 생활이 그의 사상과 문학을 더욱 심화시켰다. 고문(古文)의 대가로 한유(韓愈)와 함께 고문운동(古文運動)을 제창하여 한유(韓柳)로 병칭되었으나 사상적 입장에서는 서로 대립적이었다. 한유가 전통주의인 데 반하여 유종원은 유교와 도교와 불교를 참작하고 신비주의를 배격한 자유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천설(天說), 비국어(非國語), 봉건론(封建論) 등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또 우언(寓言) 형식의 풍자문(諷刺文)과 산수(山水)에 그려낸 산문에도 능했다. 그는 이러한 작품을 통해 관료를 비판하고 현실을 반영하는 한편, 자신의 우울과 고민을 술회하였는데 그 자구(字句)의 완숙미와 표현의 간결정채함이 특히 뛰어났다. 산수시(山水詩)에 특히 뛰어나 도연명(陶淵明)과 비교되었고, 왕유(王維)맹호연(孟浩然)과 더불어 당시(唐詩)의 전원파를 형성하였다. 송별시와 우언시(寓言詩)에도 뛰어나 우분애원(憂憤哀怨)의 서정을 표현하는 수법이 굴원(屈原)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저서에 유선생문집(柳先生文集), 용성록(龍城錄), 유하동집(柳河東集) 45, 외집(外集) 2, 보유(補遺) 1권 등이 있다. 한유(韓愈), 구양수(歐陽脩),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 왕안석(王安石), 증공(曾鞏) 등과 함께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초죽[楚竹] 중국의 초 지방에서 나는 조릿대류(). ()는 영주(永州) 등 호남성(湖南省)일대로 춘추 전국시대에는 초()나라 영토에 속하였기 때문에 초라 일컬어진다.

애내[欸乃] 삐걱삐걱(노 젓는 소리). 어기야디야 어기여차(뱃노래 소리). 배의 노를 젓는 데 따라 일어나는 소리. 배에서 노를 저으면서 부르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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