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길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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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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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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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夜洛城聞笛[춘야낙성문적] 봄밤에 낙양성에서 피리소리를 듣다

 

- 李白[이백] -

 

誰家玉笛暗飛聲[수가옥적암비성] 누구인가 은은히 들려오는 피리소리

散入春風滿洛城[산입춘풍만낙성] 봄바람에 흩들어 낙양성에 가득하네

此夜曲中聞折柳[차야곡중문절류] 이 밤 부는 곡중에 절류곡도 들리니

何人不起故園情[하인불기고원정] 누구인들 고향생각 일어나지 않으랴

 


  • 이백[李白]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의 시인. 자(字)는 태백(太白)이고. 호(號)는 취선옹(醉仙翁)·해상조오객(海上釣鰲客)·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태어날 때 어머니가 꿈에 태백성(太白星)을 보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서역(西域)의 호상이었다고 전한다. 출생지는 오늘날의 사천성(四川省)인 촉(蜀)의 창명현(彰明縣) 또는 더 서쪽의 서역으로서, 어린 시절을 촉나라에서 보냈다. 천보(天寶) 원년(元年: 742년) 가을에 처음 장안(長安)에 나와 하지장(賀知章)을 만나 적선인(謫仙人)으로 찬양되면서, 그 명성이 온 세상에 퍼졌다. 그 뒤 현종(玄宗)을 알현하여 시문의 재능을 인정받아 한림공봉(翰林供奉)으로 임명되고 궁정 시인이 되기도 했으나, 현종의 실정 이후 정치에 뜻을 잃고 방랑시인이 되었다. 성품이 호방하여 세속에 매이지 않아 천하를 유람하며 시주(詩酒)로 생활하였다. 시풍이 웅기하고 호방하며 상상력이 풍부하고 언어의 흐름이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음률의 조화와 변화가 다양하다. 그의 시는 서정성(抒情性)이 뛰어나 논리성(論理性), 체계성(體系性)보다는 감각(感覺), 직관(直觀)에서 독보적(獨步的)이다. 술, 달을 소재(素材)로 많이 썼으며, 낭만적(浪漫的)이고 귀족적(貴族的)인 시풍을 지녔다. 천하를 주유하며 수많은 시를 남겼으며, 그의 생활 태도를 반영한 대표작으로는 촉도난(蜀道難)이 있다.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며 한시(漢詩)의 양대 산맥으로 일컬어져 이백(李白)은 시선(詩仙), 두보(杜甫)는 시성(詩聖)으로 불린다. 성당(盛唐) 시기 시가(詩歌) 예술의 최고봉에 올랐다. 지금까지 전하는 시가 1천여 편에 달하고 이태백시집(李太白詩集) 30권이 있다.
  • 수가[誰家] 누구네 집. 어떤 곳. 누구. 어떤 사람. 이백(李白)의 시 춘야낙성문적(春夜洛城聞笛)에 “누군가 불어대는 피리 소리가, 봄바람 타고 온 낙성으로 퍼져 나가네.[誰家玉笛暗飛聲 散入春風滿洛城]”라고 하였다.
  • 옥적[玉笛] 옥으로 만든 대금(大笒) 비슷하게 만든 피리. 청옥이나 황옥으로 만든, 대금과 비슷한 모양의 피리.
  • 암비성[暗飛聲] 피리소리가 들릴 듯 말 듯 은은히 들려옴을 형용함.
  • 낙성[洛城] 낙양성(洛陽城). 당나라 부도(副都)인 낙양(洛陽)을 가리킨다.
  • 절류[折柳] 별리곡(別離曲)인 절양류(折楊柳)로 악부곡(樂府曲) 이름인데, ‘버드나무 가지를 꺾다’라는 뜻으로 이별을 나타낸다. 절류가 이별을 뜻하게 된 데는 멀리 주(周)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는데, 한대(漢代)에 이르러 풍속화가 되었다고 한다. 한대(漢代) 장안(長安)의 사회상을 기록한 삼보황도(三輔黃圖)에 “패교는 장안 동쪽 물을 건너기 위해 세운 다리이다. 한인(漢人)들이 길 떠나는 이와 헤어질 때, 이 다리에서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주며 이별했다.[覇橋在長安東, 誇水作橋, 漢人送客至此橋, 折柳送別.]”라고 하였다. 버들은 이별할 때 꺾어주던 상징물로 몇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버들은 봄철에 가장 빨리 잎을 틔우기 때문이다. 이는 길 떠난 이가 봄철 잎을 틔운 버들을 보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재촉하는 마음을 지니길 바라는 보내는 이의 마음이 담겼다. 둘째, 버들은 생명력이 강한 나무이기 때문이다. 이는 길 떠난 이가 어디를 가던 건강하기를 바라는 보내는 이의 마음이 담겨있다. 셋째, 버들은 가늘어 말채찍으로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떠나는 이가 어서 말을 몰고 갔다 오기를 바라는 보내는 이의 마음을 담고 있다.
  • 절류[折柳] 절류(折柳)는 버들가지를 꺾는다는 말로, 이별을 뜻하는 말이다. 한(漢)나라 사람들이 헤어질 때에는 장안(長安) 동쪽 패교(覇橋)에 와서 버들가지를 작별 선물로 주곤 하였으므로, 버들가지를 꺾는 것이 증별(贈別) 혹은 송별(送別)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三輔黃圖 橋> 고대시문 중에서는 흔히 버드나무로 이별을 표시하였다. 참고로, 이백(李白)의 시 춘야낙성문적(春夜洛城聞笛)에 “이 밤 절류곡도 들려오니, 뉘라서 일어나 고향 생각 않겠나.[此夜曲中聞折柳 何人不起故園情]”라고 하였고, 백거이(白居易)의 시 청문류(靑門柳)에 “도성 문 가까이 송별을 많이 하는지라, 긴 가지 모두 꺾여 봄바람이 줄었도다.[爲近都門多送別 長條折盡減春風]”라는 명구(名句)가 나온다. 또, 시경(詩經) 소아(小雅) 채미(採薇)에 “지난 날 내가 떠날 때는, 버드나무가 봄바람에 하늘거렸는데, 지금 내가 돌아갈 생각 하니, 진눈깨비 날리는 겨울 되었네.[昔我往矣, 楊柳依依, 今我來思, 雨雪霏霏.]”라고 하였다.
  • 절류곡[折柳曲] 고대의 악부의 하나인 절양류곡(折楊柳曲)으로, 버들가지를 꺾으면서 이별하는 아쉬운 정을 노래하였다.
  • 절양[折楊] 옛날의 속곡(俗曲) 이름이다. 이별 또는 이별의 마음을 뜻한다. 한(漢)나라 사람들이 이별할 때 장안(長安) 동쪽에 있던 파교(灞橋)에 이르러 버들가지를 꺾어 주었던 데서 유래하였다. 이별의 정을 노래한 절양류(折楊柳)란 고대의 악곡이 있다.
  • 절양류[折楊柳] 악부 횡취곡사(橫吹曲辭) 중의 하나이다. 절양류(折楊柳)는 버들가지를 꺾어서 준다는 뜻으로, 한나라 때 가까운 사람을 전송할 때 장안(長安)의 동쪽에 있는 패교(霸橋)라는 다리에 나가서 버들가지를 꺾어 주는 풍속이 있었기 때문에, 뒤에는 ‘절류(折柳)가 증별(贈別)이나 송별(送別)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남조(南朝)부터 당나라 때까지 많은 시인들이 작품을 남겼는데, 봄날을 상심하고 이별을 슬퍼하거나 정벌 나간 사람을 그리워하는 내용이었다.
  • 절양류가[折楊柳歌] 절양류(折楊柳)는 횡취곡명(橫吹曲名)이기도 하고 사패명(詞牌名)이기도 하다. 한(漢)나라 때 장건(張騫)이 서역(西域)에서 덕마하두륵곡(德摩河兜勒曲)을 전하여 들여왔고, 이연년(李延年)이 이를 인하여 신성(新聲) 28해(解)를 만들어 무악(武樂)으로 삼았는데, 위진(魏晉) 시대에 옛 가사를 잃어버렸다. 그 뒤 진(晉) 태강(太康) 말엽에 경락(京洛)에 절양류가(折楊柳歌)가 있었는데, 이는 대부분 군사들의 수고로움을 노래한 것이었다. 남조(南朝)의 양(梁)과 진(陳) 및 당(唐)나라 사람들의 작품은 대부분 봄날을 상심하고 이별을 슬퍼하는 노래로 읊었으며, 정벌 나간 사람을 그리워하는 작품도 있다. 곡은 대부분 5언으로 되어 있으며, 오직 당나라 때에만 7언으로 읊었다.
  • 절양류곡[折楊柳曲] 절양류(折楊柳)는 옛 악부(樂府)의 사곡(詞曲) 이름이다. 대개 중국 고대의 이항(里巷) 가요(歌謠)에서 나온 것으로 이별의 노래라고 한다. 한(漢)나라 사람들이 전별할 때 장안(長安) 동쪽에 있던 파교(灞橋)에 이르러 버들가지를 꺾어 주었던 데서 유래하였는데, 중국에서는 이별할 때에, 여행 중 무사하라고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둥글게 원을 만들어 주는 풍습이 있었다.
  • 절양황화[折楊黃華] 절양(折楊)과 황화(黃華)는 옛날의 속곡(俗曲) 이름으로, 세속 사람들이 좋아하는 저급한 음악이다. 왕안석(王安石)의 기제영주백설루(寄題郢州白雪樓)에서 “절양과 황화 듣곤 좋아서들 활짝 웃고, 양춘과 백설에는 화답하는 사람 적지.[折楊黃華笑者多 陽春白雪和者少]”라고 하였다.
  • 고원정[故園情]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고원(故園)은 전(前)에 살던 곳, 고향(故鄕)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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