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길 시집 - 저 너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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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
安定城樓[안정성루] 안정성루
- 李商隱[이상은] -
迢遞高城百尺樓[초체고성백척루] 아득해라 드높은 성 백 척의 누대
綠楊枝外盡汀洲[녹양지외진정주] 푸른 버들가지 밖은 온통 모래밭
賈生年少虛垂涕[가생년소허수체] 가의는 어려서 헛되이 눈물 흘렸고
王粲春來更遠遊[왕찬춘래갱원유] 왕찬은 봄이 와도 먼 곳을 떠돌았지
永憶江湖歸白髮[영억강호귀백발] 백발 되면 강호 가자 늘 생각하나
欲回天地入扁舟[욕회천지입편주] 세상 바로 잡고 일엽편주 오르려네
不知腐鼠成滋味[부지부서성자미] 썩은 쥐 맛있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猜意鵷雛竟未休[시의원추경미휴] 원추에 대한 시샘 그칠 날이 없구나
❍ 이상은[李商隱] 만당(晩唐)의 시인으로, 자(字)는 의산(義山), 호(號)는 옥계생(玉谿生) 또는 번남생(樊南生)이다. 원적은 회주(懷州) 하내(河內: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심양沁陽)지만 조부 때 형양(滎陽: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정주鄭州)으로 옮겨왔다. 개성(開成) 2년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동천절도사판관(東川節度使判官)과 검교공부원외랑(檢校理部員外郞)을 지냈다. 당시 우승유(牛僧孺)와 이덕유(李德裕)가 정치적으로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는데, 처음에 우당(牛黨)의 영호초(令狐楚)에게서 병려문(騈儷文)을 배우고 그의 막료가 되었다가, 나중에 반대당인 이당(李黨)의 왕무원(王茂元)의 서기가 되어 그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두 파 간의 새력다툼으로 관직에 오르기도 하고 귀양 가기도 하는 기구한 생애를 보냈다. 형양(滎陽)에서 객사하였다. 굴절이 많은 화려한 서정시를 썼는데, 시적 성취가 상당하여 두목(杜牧)과 함께 소이두(小李杜)로, 온정균(溫庭筠)과 함께 온이(溫李)로 불렸으며, 같은 시기의 단성식(段成式), 온정균(溫庭筠)과 시의 풍격이 가까웠는데 이들 세 사람의 가족 내 배항이 16번째라 이들을 합해 삼십육체(三十六體)라고 불렀다. 당시삼백수(唐詩三百首)에 22편의 작품이 실려 수량으로는 네 번째로 많다. 그의 시는 한(漢)·위(魏)·육조시(六朝詩)의 정수를 계승하였고, 두보(杜甫)를 배웠으며, 이하(李賀)의 상징적 기법을 사랑하였다. 또한 전고(典故)를 자주 인용, 풍려(豊麗)한 자구를 구사하여 수사문학(修辭文學)의 극치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저서로 이의산시집(李義山詩集)과 번남문집(樊南文集)이 있으며, 이의산잡찬(李義山雜纂)도 그의 저작으로 전한다.
❍ 안정[安定] 안정(郡名)은 군명으로 경주(涇州)를 이른다.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경천현(涇川縣) 북쪽이다. 당대(唐代)에는 경원절도사(涇原節度使)의 치소(治所)가 이곳에 있었다.
❍ 초체[迢遞] 아득히 멀다. 까마득하게 높다. 길게 이어져 끊임이 없는 모양을 가리킨다. 왕유(王維)의 시 귀숭산작(歸嵩山作)에 “아득히 먼 숭산 밑에 터 잡아두고, 문 걸어 잠근 채 손님 맞지 않았네[迢遞嵩高下 歸來且閉關]”라고 하였고, 두보(杜甫)의 시 송번이십삼시어부한중판관(送樊二十三侍御赴漢中判官)에 “남아 있는 사람은 쓸쓸히 늙어가고, 길나서는 사람은 멀리 떠나네[居人莽牢落 游子方迢遞]”라고 하였다.
❍ 정주[汀洲] 강·내·못·호수(湖水)·바다 등의 물이 얕고 흙·모래가 드러난 곳. 토사가 침적하여 만들어진 평평한 땅. 사주(砂洲). 모래톱. 모래섬. 이상은(李商隱)의 시 안정성루(安定城樓)에 “아득해라 높은 성의 백 척 누각이여, 푸른 버들가지 말고는 온통 모래섬뿐[迢遞高城百尺樓 綠楊枝外盡汀洲]”라고 하였다.
❍ 가생[賈生] 가의(賈誼)를 가리킨다. 서한(西漢) 낙양(洛陽) 사람이다. 18세 때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능히 외우고 문장을 잘 지어 재사(才士)로 이름났다. 하남군수(河南郡守) 오공(吳公)이 한(漢) 문제(文帝)에게 천거하여 20여 세에 등용되어 박사(博士)가 되었고, 곧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승진하여 정삭(正朔)을 바꾸고 예악(禮樂)을 일으킬 것을 건의하였다. 그는 문제에게 변방의 소란 및 내부의 불안정한 상황 등 시국(時局)을 구제하기 위해 치안책(治安策)을 올리면서 “삼가 현재의 상황을 살펴보건대, 통곡할 만한 일이 한 가지요, 눈물을 흘릴 만한 일이 두 가지요, 장탄식할 만한 일이 여섯 가지입니다[竊惟事勢 可爲痛哭者一 可爲流涕者二 可爲長太息者六]”라고 전제한 뒤에 하나씩 설명한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48 賈誼傳>
❍ 가생[賈生] 가의(賈誼)를 말한다. 기원전 200년에 태어나서 168년 33세의 나이로 요절한 하남성 낙양(洛陽) 출신의 서한 초기 문인에 학자이자 정치가이다. 시문에 뛰어나고 제자백가의 설에 정통하여 한문제(漢文帝)의 총애를 받아 약관의 나이로 최연소 박사가 되었다. 1년 만에 다시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어 진(秦)나라 때부터 내려온 율령·관제·예악 등의 제도를 개정하고 전한의 관제를 정비하기 위한 많은 의견을 상주하였다. 그러나 주발(周勃) 등 당시 창업공신 출신의 고관들로부터 견제를 받아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좌천되었다. 자신의 불우한 운명을 굴원(屈原)에 비유하여 복조부(鵩鳥賦)와 조굴원부(弔屈原賦)를 지었으며, 초사(楚辭)에 수록된 석서(惜誓)는 그의 작품으로 알려졌다. 4년 뒤 복귀하여 문제의 막내아들 양왕(梁王)의 태부가 되었으나 왕이 낙마하여 급서하자 상심한 나머지 1년 후인 기원전 33세의 나이로 죽었다. 저서에 신서(新書) 10권이 있으며, 진(秦)의 흥망성쇄를 논한 과진론(過秦論)은 유명하다.
❍ 수체[垂涕] 눈물을 흘리다. 울다.
❍ 왕찬[王粲] 후한(後漢) 말기와 삼국 시대 위(魏)나라의 문인으로 자가 중선(仲宣)이다. 산양(山陽) 고평(高平) 사람이다. 박람다식(博覽多識)하고 문사(文詞)가 넉넉하였다. 후한(後漢) 헌제(獻帝)가 동탁(董卓)의 강요에 못 이겨 장안(長安)으로 천도하였을 때 배종했고, 거기서 당대의 학자 채옹(蔡邕)의 눈에 들었다. 채옹(蔡邕)은 그의 재주를 훌륭하게 여겨 그가 올 때마다 신을 거꾸로 신고 나와 마중하였다 한다. 17세 때에 사도(司徒)의 임명을 사양하였다. 얼마 후 동탁이 암살되어 장안이 혼란에 빠지자 형주(荊州)로 몸을 피해 유표(劉表)를 의탁해 15년을 지냈다. 유표가 죽자 유표의 아들 유종(劉琮)을 설득하여 조조(曹操)에게 귀순시키고 자신도 승상연(丞相椽)이 되고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 후에 조조가 위왕이 되자 시중(侍中)으로서 제도개혁에 진력하는 한편, 조씨 일족을 중심으로 하는 문학집단 안에서 문인으로서도 활약하였다. 조식(曹植)과 더불어 조왕(曹王)으로 불렸다.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이자 대표적 시인으로 가장 표현력이 풍부하고 유려하면서도 애수에 찬 시를 남겼는데 등루부(登樓賦), 종군시(從軍詩) 5수, 칠애시(七哀詩) 3수는 유명하다. 문집으로 왕시중집(王侍中集)이 있다. 왕찬이 일찍이 유표(劉表)에게 가서 의지해 있을 때 유표는 그의 외모가 못생기고 몸이 약하며 예법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하여 별로 중시하지 않았다. 왕찬은 뜻을 얻지 못하고 고향이 그리워지자 당양성루(當陽城樓: 혹은 강릉성루江陵城樓)에 올라가 시사를 한탄하고 고향을 생각하며 진퇴위구(進退危懼)의 정을 서술하여 등루부(登樓賦)를 지었는데 그 부(賦)에 “참으로 아름답지만 내 땅이 아니니, 어찌 잠시인들 머물 수 있으리오[雖信美而非吾土兮 曾何足以少留]”라고 하였고, 또 “인정은 다 같이 고향을 그리워함이여, 어찌 궁달을 인하여 마음을 달리하랴[人情同於懷土兮 豈窮達而異心]”라고 하였다. <文選 卷11 登樓賦><三國志 卷21 魏書 王粲傳>
❍ 원유[遠遊] 자기 고장을 떠나 타지(他地)로 가서 학문(學問)하는 것을 유학(遊學)이라 하고, 타지에서 벼슬살이를 하는 것을 유환(遊宦)이라 한다. 유(遊)에는 유식(遊息)·유람(遊覽)의 뜻 이외에 외지(外地)에 머물러 있는 뜻도 있으니, 원유(遠遊)는 곧 유람·유학·유환의 목적으로 먼 고장으로 가서 머무는 것을 이른다.
❍ 원유[遠遊] 굴원(屈原)이 지은 원유편(遠遊篇)을 말하는데, 그 내용은, 굴원의 방직(方直)한 행실이 세상에 용납되지 않아 소인(小人)들의 참소로 곤욕을 받으면서 어디에도 호소할 곳이 없자, 굴원이 이에 선인(仙人)들과 함께 유희(游戲)하면서 천지 사방(天地四方)을 이르지 않은 데 없이 두루 유람(遊覽)하고자 하는 뜻을 피력한 것이다.
❍ 회천지입편주[回天地入扁舟] 춘추 시대 범려(范蠡)가 월(越)나라 구천(句踐)을 도와 오(吳)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물러나 조각배를 타고 오호(五湖) 지역을 떠다녔다고 한다. <史記 卷129 貨殖列傳>
❍ 자미[滋味] 자양분(滋養分)이 많고 좋은 맛, 또는 그러한 음식(飮食)을 이른다.
❍ 원추부서[鵷鶵腐鼠] 원추와 썩은 쥐. 원추(鵷鶵)는 전설상의 새로 봉황(鳳凰)의 일종이라 한다.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양(梁)나라의 정승으로 있는 혜자(惠子)가 장자를 의심하여 자기의 정승 자리를 빼앗아가지 않을까 걱정을 하니, 장자가 말하기를 “남쪽 지방에 원추라는 새가 있는데, 자네도 아는가? 이 새는 남해(南海)에서 날아올라 북해(北海)까지 날아가는데, 오동(梧桐)이 아니면 앉지 않고 연실(練實)이 아니면 먹지 않으며 예천(醴泉)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 이때에 부엉이가 썩은 쥐를 한 마리 차지하고 있다가, 하늘 위에 원추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원추가 그 쥐를 빼앗을까 봐 올려다보고 ‘꿱![嚇]’ 하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지금 자네는 자네가 가진 양국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나에게 ‘꿱!’ 하고 소리를 지르려 하는가?[南方有鳥, 其名爲鵷鶵, 子知之乎? 夫鵷鶵, 發於南海而飛於北海, 非梧桐不止, 非練實不食, 非醴泉不飮. 於是鴟得腐鼠, 鵷鶵過之, 仰而視之曰:‘嚇!’ 今子欲以子之梁國而嚇我邪?]”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莊子 秋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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