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길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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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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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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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興八首[其五]추흥8수5 / 가을 날의 정취

 

- 杜甫[두보] -

 

蓬萊宮闕對南山[봉래궁궐대남산] 봉래궁궐은 종남산을 마주하고

承露金莖霄漢間[승로금경소한간] 승로반 구리기둥 하늘에 닿겠네

西望瑤池降王母[서망요지강왕모] 서쪽 요지에는 서왕모 내려올 듯하고

東來紫氣滿函關[동래자기만함관] 동에서 오는 자기 함곡관에 가득하네

雲移雉尾開宮扇[운이치미개궁선] 구름이 움직이듯 치미선이 열리며

日繞龍鱗識聖顔[일요용린식성안] 햇볕 감싼 곤룡포의 황제가 보이겠지

一臥滄江驚歲晩[일와창강경세만] 청강에 누운 채 한 해를 보냄에 놀라니

幾回靑瑣點朝班[기회청쇄점조반] 궁정의 조회에 끼었던 게 그 몇 번인가

 


  • 두보[杜甫] 성당기(盛唐期)의 시인으로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야로(少陵野老), 두릉야로(杜陵野老), 두릉포의(杜陵布衣) 등이 있다. 양양(襄陽) 지방 출신으로 과거에 응시했으나 실패하고 40대인 천보(天寶) 14년(755년)에야 비로소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안녹산(安祿山)의 난 당시 장안에서 반군에게 잡혔다가 탈출, 숙종(肅宗)의 진영에 합류하여 좌습유(左拾遺)와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을 지낸 적이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두습유(杜拾遺), 두공부(杜工部) 등으로 불렀고, 또 장안성 밖 소릉(少陵)의 초당(草堂)에서 지낸 적이 있기 때문에 두소릉(杜少陵), 두초당(杜草堂)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는 시선(詩仙) 이백(李白)과 함께 이두(李杜)로 불렸는데, 두목(杜牧)과 이상은(李商隱)의 합칭인 소이두(小李杜)와 구별하기 위해 대이두(大李杜)라고도 부른다. 문학을 발판 삼아 벼슬로 나아가려던 그의 꿈이 큰 성취를 이루지 못함으로써 짧은 한때를 빼고는 평생을 가난과 병으로 고생을 겪어야 했다. 중국의 서북 지역을 유랑하다가 결국 병사했다. 벼슬살이와 달리 문학, 특히 시에서 이룬 성취가 대단하였다. 남긴 시가 1500여 수에 달하며 작품집으로 두공부집(杜工部集)이 있다. 후세 사람들에게 그 자신은 시성(詩聖)으로, 또 그의 시는 시사(詩史)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얻었다.
  • 정회[情懷] 가슴에 사무쳐 오는 정과 회포. 생각하는 정과 회포(懷抱).
  • 봉래궁[蓬萊宮] 봉래산(蓬萊山)의 선궁(仙宮)을 말한다. 봉래산은 동해 가운데에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다. 전하여 제왕(帝王)의 궁전을 가리키는바, 당대(唐代)에는 장안(長安) 동쪽 봉래지(蓬萊池) 옆에 있던 대명궁(大明宮)을 고종(高宗)이 봉래궁으로 개칭하여, 이로부터 봉래궁이라는 궁전이 실재하게 되었다. 이백(李白)의 시 효고(效古)에 “아침에 천원으로 들어가 황제를 봉래궁에서 배알하였네.[朝入天苑中 謁帝蓬萊宮]”라고 하였다. <李太白集 卷23>
  • 봉래궁궐[蓬萊宮闕] 당(唐)나라 수도 장안(長安) 동쪽에 있던 궁궐로, 원래는 대명궁(大明宮)이었는데 당 고종(唐高宗)이 대명궁을 중수(重修)하여 봉래궁(蓬萊宮)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궁 뒤편에 봉래지(蓬萊池)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전하여 제왕(帝王)의 궁전을 가리킨다. 대명궁은 당고종(唐高宗)의 집정궁이었다.
  • 남산[南山] 남산은 중국 섬서성(陝西省) 남쪽에 있는 산으로 동쪽은 하남성(河南省) 서쪽은 감숙성(甘肅省)까지 뻗쳐 있으며, 주봉(主峯)은 장안현(長安縣)의 남쪽에 있다. 이곳은 중국의 서부인 옹주(雍州)에 해당하며 서도(西都)인 장안(長安) 지방으로서 옛날 주(周) 나라의 옛터이며, 진(秦) 나라의 발상지(發祥地)이다. 일명은 종남산(終南山), 또는 귤산(橘山)・진산(秦山)・주남산(周南山)・지폐산(地肺山)이라고도 한다.
  • 승로[承露] 이슬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 승로[承露] 현악기(絃樂器) 금의 앞판 위의 끝으로 넓이 다섯 치 높이 다섯 리 정도로 도도록한 부분.
  • 승로반[承露盤] 사정전훈의(思政殿訓義)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제4권 하 한 무제(漢武帝) 원정(元鼎) 2년 강(鋼)에 “봄에 백량대(柏梁臺)를 건조하고 승로반(承露盤)을 만들었다.”라고 하였으나 그 아래 훈의에 승로반의 뜻이 해석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동서(同書) 제5권 상 한 무제(漢武帝) 원봉(元封) 2년 강(鋼)에 “비렴관(蜚廉觀), 계관(桂觀), 통천경대(通天莖臺)를 만들었다.”라 하고 아래 훈의(訓義)에 “대(臺) 위에 승로반(承露盤)이 있는데 선인(仙人)이 옥잔을 잡고 받들어 구름 위에 있는 이슬을 받게 하였다.[臺上 有承露盤 仙人掌擎玉杯 以承雲表之露]”라고 하였다.
  • 승로반[承露盤] 승로반은 이슬을 받기 위해 만든 동반(銅盤)을 말한다. 한 무제(漢武帝)가 신선술(神仙術)에 미혹되어 감로(甘露)를 받아 마시고 장생(長生)을 하고자 하였다. 이에 장안(長安)의 건장궁(建章宮) 서쪽 신명대(神明臺)에 금동(金銅)으로 선인장(仙人掌) 모양을 만들어 세워 동반(銅盤)을 떠받치고서 감로를 받게 하였다. 선인승로반(仙人承露盤). <漢書 卷二十五 郊祀志上>
  • 승로반[承露盤]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불로장생하기 위해 원정(元鼎) 2년에 건장궁(建章宮) 신명대(神明臺)에 승로반(承露盤)이라는 구리 쟁반을 설치하여 여기에 맺힌 이슬에 옥가루를 타서 마셨다. 그 후 위(魏)나라 명제(明帝)가 본받아서 또 소림원(蘇林園)에 승로반을 설치하였다. <史記 卷28 封禪書>
  • 승로반[承露盤] 한(漢)나라 효무제(孝武帝)가 승로반(承露盤)을 들고 서 있는 선인을 구리로 주조하였다. 뒤에 한나라가 망하자 조조(曹操)의 손자인 위 명제(魏明帝)가 청룡(靑龍) 1년(233) 8월에 궁관을 불러서 승로반 선인을 궁전 앞에 옮겨다 세워두라고 명하니 궁관들이 승로반 선인을 해체하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위 명제는 이 승로반 선인과 같은 크기로 또 하나의 승로반 선인을 구리로 주조하여 그 옆에 세워 두었다. <緯略 卷9 承露盤銘>
  • 금경[金莖] 한 무제(漢武帝)가 세웠던 승로반(承露盤)의 동주(銅柱)를 가리킨다. 한무제가 일찍이 신선을 사모한 나머지 백양대(柏梁臺)를 쌓고 20장(丈) 높이의 구리 기둥[銅柱]을 세우고, 선인장(仙人掌)에 승로반(承露盤)을 받쳐 들게 하여 이슬을 받아 옥설(玉屑)을 타서 마시며 신선(神仙)을 구하였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 반고전(班固傳)에 “금경이 나란히 솟아있다.[擢雙立之金莖]”라 하고, 그 주에 “효무제가 백량대를 쌓고 구리기둥을 세워 승로선인장을 받들게 하였다. 금경은 구리기둥이다.[孝武作柏梁銅柱 承露仙人掌之屬 金莖銅柱也]”라고 하였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이슬 받는 금경이 운한 사이에 솟았도다.[承露金莖雲漢間]”라고 하였다. <天中記, 後漢書 卷40下 班固列傳>
  • 금경[金莖] 금경(金莖)은 한 무제(漢武帝)가 세웠던 승로반(承露盤)의 동주(銅柱)를 가리킨다. 한무제가 일찍이 신선을 사모한 나머지, 건장궁(建章宮)에 동(銅)으로 선인장(仙人掌)을 만들어 세워서 승로반을 받쳐 들고 이슬을 받게 하여 그 이슬을 옥가루에 타서 마셨다는 고사가 전한다. 당나라 때 시인 이상은(李商隱)의 한궁사(漢宮詞)에 “시종신 중에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소갈증이 가장 심하였거늘, 금경의 이슬 한 잔도 하사하지 아니했네.[侍臣最有相如渴, 不賜金莖露一杯.]”라고 하였다. 사마상여는 한나라 때의 저명한 문장가로, 한 무제(漢武帝) 밑에서 벼슬을 살았는데, 소갈증(消渴症)을 앓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漢書 卷25 郊祀志上,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 금경[金莖] 금경(金莖)은 한 무제(漢武帝)가 세웠던 승로반(承露盤)의 동주(銅柱)이다. 한무제가 장안(長安) 서쪽에 태액지(太液池)를 만들고, 그 속에 영주(瀛洲), 봉래(蓬萊), 방장(方丈)의 삼신산을 본떠서 산을 만들어 세웠으며, 또 감로(甘露)와 옥가루를 섞어 마시면 불로장생한다는 설에 따라 감로(甘露)를 받으려고 선인장(仙人掌) 모양의 승로반(承露盤)을 만들어 구리 기둥으로 높이 받쳐 세웠는데, 이 구리 기둥을 가리키는 말이다. <史記 封禪書, 漢書 郊祀志上 註>
  • 금경[金莖] 창랑주(滄浪洲)에 핀다는 꽃 이름이다. 창주(滄州)에 금지(金池)가 있고, 여기에 금경꽃이 있는데, 이것을 따지 않고는 선계(仙界)에 갈 수 없다고 한다.
  • 소한[霄漢] 은하수(銀河水). 높은 하늘. 아득히 먼 곳. 운소(雲霄)와 천하(天河), 즉 천공(天空). 임금이 있는 도성 일대. 또는, 때를 만나 고관이 됨을 이르기도 한다. 명(明)나라 하경명(何景明)의 화학부(畫鶴賦)에 “오호라, 새는 군자에 비유할 수 있으니, 때를 만나면 소한이요 때를 잃으면 가시밭이다.[吁嗟, 鳥類比之君子, 遇則霄漢, 失則荊杞.]”라는 구절이 있다.
  • 요지[瑤池] 고대 신화 속에 나오는 곤륜산(崑崙山)에 있는 선경(仙境)으로 여신(女神)인 서왕모(西王母)가 산다고 하는데, 이곳에는 천년 만에 한 번씩 꽃이 피고 열매가 여는 반도(蟠桃)가 있다고 한다. 서왕모(西王母)가 주 목왕(周穆王)을 영접하여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는 전설이 있다. 목천자전(穆天子傳)에서 주목왕(周穆王)에 대해 기록하면서 “요지에서 서왕모와 술을 마셨다.[觴西王母于瑤池之上]”라고 하였다. <穆天子傳 卷3 古文>
  • 요지[瑤池] 요지(瑤池)는 전설상의 선계(仙界)인 곤륜산(崑崙山)의 일부 지역으로,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영약(靈藥)을 가졌다고 하는 신화 속의 여선(女仙) 서왕모(西王母)가 산다는 옥산(玉山)의 아름다운 연못이다. 주 목왕(周穆王)이 정사는 돌보지 않은 채 팔준마(八駿馬)가 모는 수레를 타고 천하를 두루 유람하다가 곤륜산 꼭대기의 요지에 이르러 서왕모의 환대를 받고 연회를 가졌다고 한다. <史記 卷123 大宛列傳, 列子 周穆王> 곤륜산은 신선 세계의 대명사로도 쓰인다.
  • 왕모[王母] 왕모(王母)는 중국 곤륜산(崑崙山)에 산다는 전설적인 선녀 서왕모(西王母)를 가리킨다.
  • 서왕모[西王母] 곤륜산(崑崙山)에 살았다는 전설적인 선인(仙人)이다. 왕모(王母)라고도 불리며, 선도(仙桃: 벽도碧桃)를 심었는데 3000년에 한 번 열매가 열린다고 한다. 한 무제(漢武帝)가 장수(長壽)를 빌고 있을 때 서왕모가 선도(仙桃) 7개를 가지고 내려와 무제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 서왕모가 인간에 있는 한무제(漢武帝)를 사랑하여 밀회하려고 할 때에 파란새[靑鳥]를 보내서 선통하였다 한다. <韓武帝內傳>
  • 서왕모[西王母] 전설 속의 여신(女神). 금모(金母)라고도 한다. 옛날 곤륜산(崑崙山)에 있던 선녀(仙女)로 불로장생(不老長生)한다고 하고, 옥황상제의 첩이라고도 한다. 산해경(山海經) 서산경(西山經)에 “서왕모는 모습은 사람과 같은데 표범의 꼬리에 범의 이빨을 지니고 있었으며 휘파람을 잘 불었고 쑥대강이 모양으로 머리를 장식하였다.[西王母其狀如人 豹尾虎齒而善嘯 蓬髮戴勝]”라고 하였다.
  • 동래자기[東來紫氣] 노자(老子)가 서쪽으로 길을 떠나 함곡관(函谷關)에 거의 이르렀을 때, 관령(關令) 윤희(尹喜)가 누대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다가, 보라색 기운[紫氣]이 관문 위로 떠오는 것을 살펴보고는, 분명히 진인(眞人)이 올 것이라고 예측을 하였는데, 얼마 뒤에 과연 노자가 푸른 소를 타고 왔다는 고사가 있다. 사기(史記) 권63 노자열전(老子列傳)에 “노자는 도덕을 닦았는데, 그 학문은 자신을 숨겨 이름을 내지 않는 것을 힘썼다. 주나라에 오랫동안 살다가, 주나라가 쇠약해지는 것을 보고 마침내 그곳을 떠났다. 함곡관에 이르니, 관문을 지키는 관리인 윤희(尹喜)가 ‘선생께서 장차 숨으려 하시니, 억지로라도 저를 위해 책을 써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노자는 도덕의 뜻을 5천여 자로 쓰고 떠나가니 이것을 도덕경(道德經)이라 하며, 그가 죽은 곳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老子脩道德 其學以自隱無名爲務 居周久之 見周之衰 迺遂去 至關 關令尹喜曰 子將隱矣 彊爲我著書 於是老子 迺著書上下篇 言道德之意五千餘言而去 莫知其所終]”라고 하였다. 그리고 열선전(列仙傳)에는 “노자가 서쪽으로 갈 때에 관령 윤희가 바라보니, 자색 기운이 관에 넘실거리고 있었는데, 노자가 과연 푸른 소를 타고 지나갔다.[老子西遊, 關令尹喜望見有紫氣浮關, 而老子果乘青牛而過也.]”라는 내용이 있다. 또, 관령이외전(關令二外傳)에 의하면, 주나라 때 함곡관의 영(令)인 윤희가 누대에 올라가 사방을 관망하다가,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의 자줏빛 기운(구름)이 서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면서 “앞으로 성인이 이곳을 지나갈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청우(靑牛)를 탄 노자를 만나서 도덕경(道德經)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 자기[紫氣] 자줏빛 운기(雲氣). 상서로운 기운을 이른다. 옛날에 훌륭한 제왕이나 성현이 출현하는 조짐으로 여겼다. 귀인(貴人)의 거처를 가리키기도 한다. 함곡관(函谷關)의 말단 관료인 윤희(尹喜)는 천문학에 정통하였는데, 노자(老子)가 서유(西遊)할 적에 그 위 하늘에 자기가 서린 것을 보고 진인(眞人)이라고 여겨 뒤쫓아 가니, 노자가 그를 기특히 여겨 도덕경(道德經)을 지어 주었다는 고사가 있다. <史記 卷63 老子列傳 司馬貞索隱>
  • 자기[紫氣] 고대에 제왕이나 현자가 출현할 것을 알리는 상서로운 기운으로 받아들이던 자줏빛 구름을 가리킨다. 보물이나 보검이 내는 빛을 가리키기도 한다. 열선전(列仙傳) 관령내전(關令內傳)에 함곡관(函谷關)의 관령(關令) 윤희(尹喜)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옮겨 오는 자기(紫氣)를 보고 성인이 올 것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노자(老子)가 청우(靑牛)를 타고 왔다는 전설이 전한다. 참고로, 백거이(白居易)의 시 이도위고검(李都尉古劍)에 “흰빛은 해와 달도 빛을 죽게 하고, 자줏빛은 싸움소도 물리쳐버리네.[白光納日月 紫氣排鬥牛]”라고 하였다.
  • 함관[函關] 함곡관(函谷關)을 이른다. 전국 시대(戰國時代) 진(秦) 나라가 설치한 진(秦)에서 산동 육국(山東六國)으로 통하는 관문(關門)으로 현재의 하남성(河南省) 영보현(靈寶縣) 서남쪽에 있는데, 효함(崤函)이라고도 한다.
  • 함곡관[函谷關] 전국(戰國) 시대 진(秦)나라가 설치한 동쪽 관문(關門)으로, 현재의 하남성(河南省) 영보현(靈寶縣) 서남쪽에 있었다. 하남성(河南省)에서 섬서성(陝西省)으로 통한 군사적 요충지이다. 관문(關門)이 천연적으로 견고하고 험준하여 함곡관을 닫으면 외적이 침범하지 못한다고 한다. 효함(崤函)이라고도 한다. 진(秦)나라 수도 함양(咸陽)을 방어하는 요충지인데 유방(劉邦)이 이곳을 함락하였다.
  • 함곡관[函谷關] 함곡관은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영보현(靈寶縣) 서남쪽에 있는 관문(關門)으로 전국 시대에는 진(秦)나라의 중요한 요새였다. 함곡관은 황하(黃河) 남안의 영보(靈寶) 남쪽 10리 지점에 있는데, 동쪽 중원(中原)으로부터 서쪽 관중(關中: 지금의 西安서안)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이곳은 동서 20여 리에 걸친 황토층(黃土層)의 깊은 골짜기로 양안(兩岸)이 깎아지른 듯 솟아 있어 그 모양이 마치 함(函)처럼 생겼다고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는바, 진(秦)나라 당시 이곳은 진(秦)나라를 보호하는 천혜의 요새였기 때문에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으로 불렸다. 진(秦)나라는 함곡관(函谷關)을 나와 여러 제후국들을 침략하였는데, 침략당한 나라들은 대부분 영토를 할양하고 강화를 맺었다.
  • 치미선[雉尾扇] 고대 황제의 의장(儀仗) 가운데 하나인 꿩 꼬리로 만든 부채로, 궁궐에서 황제가 나올 때는 두 개의 부채로 황제의 모습을 가렸다가 좌정하면 두 부채를 떼어서 모습이 보이게 한다. 치미선은 은(殷)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고종(高宗) 때 꿩이 날아오는 상서가 있자 복장(服章)에 꿩의 깃을 많이 사용하였다. 주나라에서는 왕이나 후의 거복(車服)에 삽(翣)이 있었는데, 이는 바로 꿩의 깃을 엮어서 부채를 만들어 바람과 먼지를 막은 것이었다. 그 뒤 위진(魏晉) 시대 이후로는 제왕(諸王)들이 모두 이를 사용하였다. <古今注 輿服>
  • 궁선[宮扇] 궁선은 옛날 조정(朝廷) 의장(儀仗)의 일종으로 황제(皇帝)가 사용하는 장선(障扇)을 가리키는데, 꿩의 꼬리로 장식하였다. 일종의 앞을 가리는 부채이다.
  • 용린[龍鱗] 황제가 입던 곤룡포(袞龍袍)를 가리킨다.
  • 청쇄[靑瑣] 청색으로 칠한 궁중의 금문(禁門)을 가리킨다. 유학고사경림(幼學故事瓊林) 권3에 “조정은 자신궁이라 하고, 금문은 청쇄문이라고 한다.[朝廷曰紫宸, 禁門曰青瑣.]”라고 하였다. 자신전(紫宸殿)은 당(唐)과 송(宋) 양대에 이곳에서 황제가 백관을 접견하고 외국의 사신을 맞았다.
  • 청쇄[靑瑣] 한(漢) 나라 미앙궁(未央宮)의 문(門)으로, 문을 청색(靑色)으로 꾸미고 연환꽃무늬[連環花紋연환화문]를 아로새겼다. 전하여, 황궁의 문, 또는 궁정(宮廷)을 가리키기도 한다. 후한서(後漢書) 왕윤전(王允傳)에 “여포가 청쇄문 밖에 말을 세우고 왕윤을 불러 말했다. ‘공께서 가실 수 있겠습니까?’ 왕윤이 말했다. ‘사직의 영험함을 받아 위로 나라와 집안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오. 그런데 그러지 못할 것이라면 목숨을 바치리다.’라고 하였다.[布駐馬靑瑣門外, 招允曰: 公可以去乎. 允曰: 若蒙社稷之靈, 上安國家, 吾之願也. 如其不獲, 則奉身以死之.]”는 내용이 보인다.
  • 청쇄[靑瑣] 청쇄문(靑瑣門). 청쇄(靑瑣)는 쇠사슬 같은 모양을 새기고 푸른 칠을 한 한(漢)나라의 궁문(宮門)으로, 전하여 궁궐이나 조정(朝廷)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한서(漢書) 권98 원후전(元后傳)에 대한 안사고(顔師古)의 주(注)에, “푸른색을 가지고 문호(門戶) 가장자리의 아로새긴 문양에 그림을 그린 것이니, 천자의 제도이다.[以靑畫戶邊鏤中 天子制也]”라고 한 맹강(孟康)의 말과 “문미(門楣)의 틀이 두 겹으로 된 것이 사람의 옷깃이 두 겹인 것과 같은데, 안이 푸른색이므로 이름하여 청쇄라 하니, 천자의 문의 제도이다.[門楣格再重 如人衣領再重 裹者靑 名曰靑瑣 天子門制也]”라고 한 여순(如淳)의 말을 인용하고, 이에 대해 “맹강의 말이 옳다. 청쇄라는 것은 조각하여 연쇄(連鎖: 쇠사슬)의 문양을 만들어서 푸른색으로 칠한 것이다.[孟說是 靑瑣者 刻爲連鎖文 而以靑塗之也]”라고 하였다.
  • 조반[朝班] 예전에, 조회(朝會)에 참여(參與)하는 벼슬아치의 벌여 서는 차례(次例)를 이르던 말. 조열(朝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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