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길 시집 - 저 너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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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
解悶十二首[其三]해민12수3 / 번민풀이
- 杜甫[두보] -
一辭故國十經秋[일사고국십경추] 고향을 떠나온 지 훌쩍 십 여 년
每見秋瓜憶故丘[매견추과억고구] 추과 볼 때마다 더욱 그리운 고향
今日南湖采薇蕨[금일남호채미궐] 오늘도 남호가에서 고비 뜯으니
何人爲覓鄭瓜州[하인위멱정과주] 어느 누가 정과주를 찾아가 줄까
<解悶十二首三해민12수3 / 번민풀이 / 杜甫두보>
❍ 두보[杜甫] 성당기(盛唐期)의 시인으로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야로(少陵野老), 두릉야로(杜陵野老), 두릉포의(杜陵布衣) 등이 있다. 양양(襄陽) 지방 출신으로 과거에 응시했으나 실패하고 40대인 천보(天寶) 14년(755년)에야 비로소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안녹산(安祿山)의 난 당시 장안에서 반군에게 잡혔다가 탈출, 숙종(肅宗)의 진영에 합류하여 좌습유(左拾遺)와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을 지낸 적이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두습유(杜拾遺), 두공부(杜工部) 등으로 불렀고, 또 장안성 밖 소릉(少陵)의 초당(草堂)에서 지낸 적이 있기 때문에 두소릉(杜少陵), 두초당(杜草堂)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는 시선(詩仙) 이백(李白)과 함께 이두(李杜)로 불렸는데, 두목(杜牧)과 이상은(李商隱)의 합칭인 소이두(小李杜)와 구별하기 위해 대이두(大李杜)라고도 부른다. 문학을 발판 삼아 벼슬로 나아가려던 그의 꿈이 큰 성취를 이루지 못함으로써 짧은 한때를 빼고는 평생을 가난과 병으로 고생을 겪어야 했다. 중국의 서북 지역을 유랑하다가 결국 병사했다. 벼슬살이와 달리 문학, 특히 시에서 이룬 성취가 대단하였다. 남긴 시가 1500여 수에 달하며 작품집으로 두공부집(杜工部集)이 있다. 후세 사람들에게 그 자신은 시성(詩聖)으로, 또 그의 시는 시사(詩史)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얻었다.
❍ 과기[瓜期] 오이가 나오는 무렵. 전하여 지방관의 임기(任期)가 찬 것을 과기(瓜期)라 이른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장공(莊公) 8년 조에 “제후(齊侯: 제양공齊襄公)가 연칭(連稱)과 관지보(管至父)로 하여금 규구(葵丘)를 지키게 하였는데, 그들이 오이가 나오는 때에 부임하므로, 제후가 이르기를 ‘내년 요맘때쯤 오이가 나오는 때에 교체해 주겠다.’고 하였다.[齊侯使連稱管至父戍葵丘 瓜時而往 曰及瓜而代]”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어떤 직무를 띠고 멀리 나가있던 벼슬아치들이 임기가 만료되어 돌아오게 되는 것, 부임하였다가 교대하는 시기를 말한다.
❍ 정과주[鄭瓜州] 정심(鄭審)을 이른다. 당 현종(唐玄宗) 때 이름난 화가 정건(鄭虔)의 조카로, 장안(長安) 남쪽 과주(瓜州)에 별장이 있어 정과주(鄭瓜州)라 하였다. 정심(鄭審)은 비서감(秘書監)을 지냈는데 두보의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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