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길 시집 - 저 너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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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
七哀詩三首[其一]칠애시3수1 / 칠애시
- 王粲[왕찬] -
西京亂無象[서경난무상] 서경이 난리로 예측할 수 없으니
豺虎方遘患[시호방구환] 흉포한 무리들의 환란 만났네
復棄中國去[부기중국거] 다시 중원 버리고 떠나야 하니
委身適荊蠻[위신적형만] 몸을 의탁하러 형주로 가네
親戚對我悲[친척대아비] 친척들을 나를 보며 슬퍼하고
朋友相追攀[붕우상추반] 친구들은 따라오며 손을 붙잡네
出門無所見[출문무소견] 성문을 나서니 눈 둘 데가 없이
白骨蔽平原[백골폐평원] 백골이 너른 들판을 뒤덮었네
路有飢婦人[노유기부인] 길에 굶주린 아낙네 있어
抱子棄草間[포자기초간] 안고 있던 아기를 풀밭에 버리네
顧聞號泣聲[고문호읍성] 돌아보며 울부짖는 소리 들으나
揮涕獨不還[휘체독불환] 눈물만 뿌릴 뿐 돌아가지 못하네
未知身死處[미지신사처] “나도 어디서 죽을지 모르는데
何能兩相完[하능양상완] 어찌 둘 다 온전할 수 있겠니”
驅馬棄之去[구마기지거] 말을 몰아 그 자리를 벗어남은
不忍聽此言[불인청차언] 차마 이런 말 들을 수 없어서라
南登霸陵岸[남등패릉안] 남쪽 패릉의 언덕에 올라
回首望長安[회수망장안] 고개 돌려 장안을 바라보니
悟彼下泉人[오피하천인] 하천시 지은 이의 심정 깨닫겨
喟然傷心肝[위연상심간] 쓰라린 가슴에 한숨만 나오네
❍ 왕찬[王粲] 후한(後漢) 말기와 삼국 시대 위(魏)나라의 문인으로 자가 중선(仲宣)이다. 산양(山陽) 고평(高平) 사람이다. 박람다식(博覽多識)하고 문사(文詞)가 넉넉하였다. 후한(後漢) 헌제(獻帝)가 동탁(董卓)의 강요에 못 이겨 장안(長安)으로 천도하였을 때 배종했고, 거기서 당대의 학자 채옹(蔡邕)의 눈에 들었다. 채옹(蔡邕)은 그의 재주를 훌륭하게 여겨 그가 올 때마다 신을 거꾸로 신고 나와 마중하였다 한다. 17세 때에 사도(司徒)의 임명을 사양하였다. 얼마 후 동탁이 암살되어 장안이 혼란에 빠지자 형주(荊州)로 몸을 피해 유표(劉表)를 의탁해 15년을 지냈다. 유표가 죽자 유표의 아들 유종(劉琮)을 설득하여 조조(曹操)에게 귀순시키고 자신도 승상연(丞相椽)이 되고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 후에 조조가 위왕이 되자 시중(侍中)으로서 제도개혁에 진력하는 한편, 조씨 일족을 중심으로 하는 문학집단 안에서 문인으로서도 활약하였다. 조식(曹植)과 더불어 조왕(曹王)으로 불렸다.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이자 대표적 시인으로 가장 표현력이 풍부하고 유려하면서도 애수에 찬 시를 남겼는데 등루부(登樓賦), 종군시(從軍詩) 5수, 칠애시(七哀詩) 3수는 유명하다. 문집으로 왕시중집(王侍中集)이 있다. 왕찬이 일찍이 유표(劉表)에게 가서 의지해 있을 때 유표는 그의 외모가 못생기고 몸이 약하며 예법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하여 별로 중시하지 않았다. 왕찬은 뜻을 얻지 못하고 고향이 그리워지자 당양성루(當陽城樓: 혹은 강릉성루江陵城樓)에 올라가 시사를 한탄하고 고향을 생각하며 진퇴위구(進退危懼)의 정을 서술하여 등루부(登樓賦)를 지은 고사가 있다. <文選 卷11 登樓賦><三國志 卷21 魏書 王粲傳>
❍ 칠애시[七哀詩] 칠애(七哀)는 일곱 가지 슬픔이란 의미로, 위진(魏晉) 시대 악부(樂府) 가사(歌辭)의 시제(詩題)로 많이 쓰였다. 진(晉)나라 악부시가의 원시행(怨詩行)에 칠애(七哀)라는 편명이 수록되어 있다. 후한(後漢) 말의 왕찬(王粲)과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조식(曹植)과 진(晉) 나라 장재(張載)의 칠애시(七哀詩)가 전하는데, 사회의 동란을 반영하고 슬픈 감정을 표현하는 오언시(五言詩)이다. 삼국 시대 위(魏)나라 조식(曺植)의 칠애시(七哀詩)가 유명한데, 이 시에 대한 문선(文選)의 주석란에 육신(六臣)의 한 명인 당(唐)나라 여향(呂向)은 “칠애는 아파서 슬프고, 의리상 슬프고, 느꺼워 슬프고, 원망스러워 슬프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 슬프고, 입으로 탄식하며 슬프고, 코가 시어서 슬픈 것이다[七哀謂痛而哀, 義而哀, 感而哀, 怨而哀, 耳目聞見而哀, 口歎而哀, 鼻酸而哀也.]”라고 하였다. <六臣註文選 卷23> 원나라 사람 이야(李冶)는 그의 저서 경제고금주(敬齋古今黈)에 “사람의 칠정 희로애락애오옥(喜怒哀樂愛惡欲) 중 哀가 가장 앞선 감정으로 슬퍼함이 너무 심하니 나머지 감정이 없어지고 애만 남았음으로 칠애(七哀)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 서경[西京] 장안(長安). 한(漢)나라 때 동쪽의 도성(都城) 낙양(洛陽)을 동경(東京)이라 한 것의 대칭(對稱)으로 서쪽의 도성 장안(長安)을 가리키는데, 장안(長安)이 도성이었던 서한(西漢: 전한前漢)을 이르기도 한다. 한(漢)나라 장형(張衡)이 서경부(西京賦)를 지은 뒤로 서경(西京)이 서한(西漢)의 대칭(代稱)이 되었다.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왕망(王莽)을 몰아내고 세운 후한(後漢)은 장안에서 동쪽인 낙양(洛陽)에 도읍하였으므로 동경(東京) 또는 동한(東漢)이라고 칭한다. 동탁(董卓)이 한헌제(漢獻帝)를 겁박하여 장안으로 천도하였다. 당대(唐代)에 이르러서도 낙양(洛陽)을 동도(東都), 장안(長安)을 서경(西京)이라 일컬었다.
❍ 난무상[亂無象]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노양공(魯襄公) 9년에 “사약(士弱)이 대답하기를 ‘국가(國家)의 치란(治亂)은 도(道)의 유무(有無)에 달렸을 뿐입니다. 국가가 혼란(昏亂)하면 하늘이 그 조짐을 예시(豫示)하지 않으니, 알 방법이 없습니다[在道, 國亂無象. 不可知也.]’라고 하였다.”라고 보인다. 나라에 도(道)가 없으면 재변(災變)도 다르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말이다. 또, 그 부주(附注)에 “나라에 도(道)가 없으면 화란(禍亂)의 발생이 특수(特殊)하여 일정한 천상(天象)이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다는 말이다[國無道 則禍亂生殊 無一定之象]”라고 하였다.
❍ 난리[亂離] 전란. 사고나 다툼 등으로 질서가 없이 어지럽고 소란스러운 상태. 전쟁이나 폭동, 재해 등으로 세상이 몹시 소란(騷亂)하고 질서가 어지러워진 상태. 시끄럽게 소란(騷亂)을 피우는 행동이나 왁자하게 소란이 일어나는 상태를 낮잡아 야유조로 이르는 말.
❍ 시호[豺虎] 교활하고 사나운 승냥이와 호랑이를 이르는 말로, 맹수, 악인, 소인배 또는 강한 적군, 도적, 비적, 반란군 등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는 동탁(董卓)의 부장으로 동탁이 죽자 란을 일으킨 이각(李傕)과 곽사(郭汜)를 말한다.
❍ 형만[荊蠻] 형만(荊蠻)은 형주(荊州)로 춘추전국시대 초(楚)나라의 땅이다. 초나라의 원래 지명은 형(荊)이고 주(周)왕실은 남방의 이민족을 만(蠻)이라고 불러 오랑캐 취급했다. 그래서 형만(荊蠻)이란 말은 남쪽의 오랑캐를 뜻한다. 당시 형주에는 중원의 전란이 미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난을 피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일찍이 왕찬의 조부 왕창(王暢)으로부터 학문을 배운 당시 형주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는 왕찬의 집안과는 인연이 있었다. 이에 왕찬이 유표에게 몸을 의탁하려 것이다.
❍ 추반[追攀] 추수견만(追隨牽挽). 뒤쫓아 따라가며 손을 잡아당김. 뒤를 따르며 손을 잡고 놔주지 않는다는 뜻으로 슬프고 안타깝게 이별하는 모습을 형용한 것이다.
❍ 호읍[號泣] 소리 높여 목놓아 욺. 소리를 내어 부르짖으며 욺. 또는, 그 울음.
❍ 패릉[霸陵] 한문제(漢文帝: 효문황제孝文皇帝) 유항(劉恒)의 (陵號)이다. 지금의 섬서성 장안현(長安縣) 동쪽에 있다. 한문제는 유언(遺言)으로 자신의 능에 와기를 사용하게 하고 금, 은, 구리, 주석으로 장식하지 못하게 하여 패릉(覇陵)의 장사를 검소(儉素)하게 하라 하였다. 한문제는 한왕조 4백 년 기간 가장 현군으로 이름이 높았던 황제다. 문제의 치세 기간 동안 사회는 질서가 잡히고 안정되었으며 경제가 급속히 발전되었다. 그래서 한문제(文帝)와 그의 아들 경제(景帝)의 치적을 문경지치(文景之治)라고 해서 태평성대를 이룩한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다.
❍ 하천[下泉] 하천시(下泉詩). 시경(詩經) 조풍(曹風)의 편명(篇名)이다. 진후(晉侯)가 조(曹)에 들어와 그 임금을 잡아가매, 조의 신하들이 주실(周室)에 왕이 있어 패자(霸者)를 제어하지 못함을 슬퍼한 시편이다. 그 첫 구에 “차갑게 흘러내리는 저 샘물, 가라지 덤불을 적시네. 아아 내 깨어나 탄식하며, 저 주 나라 서울을 생각하노라[洌彼下泉 浸彼苞稂 愾我寤嘆 念彼周京]”라고 하였다. 한대(漢代)의 오경박사(五經博士)들은 이 시를 조나라의 국인들이 명왕과 현군을 애타게 바라면서 부른 노래라고 여겼다. 모시서(毛詩序)에 “하천은 치세를 그리워한 시이다. 조나라 사람이 공공(共公)이 하층 백성들을 침해함을 미워하면서 그 근심하는 바를 얻지 못하여 옛적의 밝은 왕과 어진 제후를 생각하면서 지은 시이다[下泉, 思治也, 曹人疾共公侵刻下民, 不得其所, 憂而思明王賢伯也.]”라고 하였다.
❍ 위연[喟然] 마음이 상해 한숨짓는 모습. 탄식하는 모양. 논어(論語) 자한(子罕)에 “안자가 위연히 탄식해 말하기를 ‘쳐다보고 올라갈수록 더욱 높고 파고들어 갈수록 더욱 단단하며, 보면 앞에 있는 것 같더니 갑자기 뒤에 있도다[顔淵喟然歎曰 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라고 하였다.”는 구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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