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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華陽], 화양건[華陽巾], 화양귀마[華陽歸馬], 화어소장[禍於蕭墻], 화엽난겸여각치[花葉難兼如角齒]

하늘구경 2026. 1. 13.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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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華陽] 은자(隱者)가 사는 곳을 가리킨다. 양(梁)의 도홍경(陶弘景)이 구곡산(句曲山)에 숨어살며 자호를 화양은거(華陽隱居)라고 하고, 무제(武帝)가 예를 갖추어 맞이하려했으나 끝내 나오지 않았다. <梁書 陶弘景傳>

화양건[華陽巾] 은자(隱者)가 쓰는 두건. 신선전(神仙傳)에 “경조(京兆)사람인 위절(韋節)이 화산(華山)의 남쪽 기슭에 은거하면서 호를 하양자(華陽子)라고 하였으며, 그가 쓰고 다니는 두건을 화양건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화양군[華陽君]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62년에 죽은 진나라의 대신이다. 미(羋) 성에 이름은 융(戎)이다. 소양왕의 모친 선태후의 동부(同父) 동생으로 소양왕에게는 외삼촌이 된다. 봉지의 이름을 따라서 엽양군(葉陽君) 혹은 신성군(新城君)이라고도 불리웠다. 처음에 진나라에 죄를 짓고 초나라에 망명했다가 소양왕이 즉위하자 권력을 잡은 선태후에 의해 진나라에 돌아와 선태후의 총애를 받았다. 소양왕 8년 기원전 299년 장군이 되어 초나라를 공략하여 신시(新市 : 지금의 호북성 경산京山 동북)를 점령했다. 후에 벼슬이 좌승상까지 올라 권세가 더욱 커져 그의 재산은 공실의 것보다 더 많게 되어, 위염(魏冉), 경양군(涇陽君) 공자시(公子市), 고릉군(高陵君) 공자회(公子悝) 등과 함께 진나라의 사귀(四貴)라 불리웠다. 소양왕 41년 범수의 계책을 채용한 소양왕이 그의 권력을 박탈했다. 선태후가 죽자 지위가 강등되어 조정에서 쫓겨났으며 다시 소양왕 45년에는 함양에서 쫓겨나 봉지로 가다가 도중에 죽었다.

화양귀마[華陽歸馬] 화양은 화산(華山)의 남쪽. 주(周) 무왕(武王)이 주(紂)를 치는 전쟁을 끝낸 뒤에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말[馬]을 화산(華山)에 돌려보내고 군수 물자를 나르던 소는 도림(桃林)의 들에 놓았다 한다. <書經 武成>

화양동[華陽洞] 화양동은 도가(道家) 삼십육동천(三十六洞天)의 제 8동으로 모군(茅君)이 다스리는 신선들이 산다는 곳이다.

화양은거[華陽隱居] 산중에 은거하면서도 매양 국사를 자문받았던 양(梁) 나라 때의 도홍경(陶弘景)을 힐난하는 말이다. 도홍경은 은사(隱士)로서 자호가 화양은거(華陽隱居)이며, 일찍이 제 고제(齊高帝) 때에 제왕시독(諸王侍讀)을 지냈고 뒤에 구곡산(句曲山)에 은거하였다. 그는 특히 음양(陰陽)·오행(五行)·선술(仙術)·의술(醫術) 등에 뛰어났는데, 양 무제(梁武帝) 때에는 모든 국가의 대사(大事)를 반드시 그에게 자문하였으므로 당시 산중재상(山中宰相)이라는 칭호가 있었다. <南史 卷七十六 隱逸下>

화어소장[禍於蕭墻] 소장은 병풍으로 가까운 데에서 화란이 싹튼다는 뜻이다. 논어(論語) 계씨(季氏)에 “나는 계손(季孫)의 걱정이 전유(顓臾)에게 있지 않고 소장(蕭墻) 안에 있을까 걱정이다.”라고 하였다.

화엄누각풍[華嚴樓閣風] 경각간에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화엽난겸여각치[花葉難兼如角齒] 뾰족한 뿔이 달린 짐승은 예리한 이빨이 없듯이 꽃이 아름다운 초목은 대체로 잎이 곱지 않다는 것이다.

화영[華英] 예쁜 꽃.

화예부인[花蕊夫人] 오대(五代) 후촉주(後蜀主)인 맹창(孟昶)의 부인인데, 문장에 능하여 궁사(宮詞) 1백 수(首)를 지었다. 후촉이 망한 후에도 항상 후촉을 잊지 않고 맹창의 초상에 제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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