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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興八首[其六]추흥8수6 / 가을 흥취

 

- 杜甫[두보] -

 

瞿塘峽口曲江頭[구당협구곡강두] 구당협 어귀에서 곡강의 머리까지

萬里風煙接素秋[만리풍연접소추] 만 리의 풍광이 가을로 이어졌네

花萼夾城通御氣[화악협성통어기] 화악루 협성에 천자가 거닐었는데

芙蓉小苑入邊愁[부용소원입변수] 작은 부용원에 변방의 시름 깃드네

珠簾繡柱圍黃鵠[주렴수주위황곡] 주렴에 수놓은 기둥 황곡이 둘렀고

錦纜牙檣起白鷗[금람아장기백구] 비단 닻줄 상아 돛대 갈매기 날으네

回首可憐歌舞地[회수가련가무지] 가련해라 춤추고 노래하던 곳이여

秦中自古帝王州[진중자고제왕주] 관중은 예로부터 제왕의 고장이거늘

 


  • 두보[杜甫] 성당기(盛唐期)의 시인으로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야로(少陵野老), 두릉야로(杜陵野老), 두릉포의(杜陵布衣) 등이 있다. 양양(襄陽) 지방 출신으로 과거에 응시했으나 실패하고 40대인 천보(天寶) 14년(755년)에야 비로소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안녹산(安祿山)의 난 당시 장안에서 반군에게 잡혔다가 탈출, 숙종(肅宗)의 진영에 합류하여 좌습유(左拾遺)와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을 지낸 적이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두습유(杜拾遺), 두공부(杜工部) 등으로 불렀고, 또 장안성 밖 소릉(少陵)의 초당(草堂)에서 지낸 적이 있기 때문에 두소릉(杜少陵), 두초당(杜草堂)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는 시선(詩仙) 이백(李白)과 함께 이두(李杜)로 불렸는데, 두목(杜牧)과 이상은(李商隱)의 합칭인 소이두(小李杜)와 구별하기 위해 대이두(大李杜)라고도 부른다. 문학을 발판 삼아 벼슬로 나아가려던 그의 꿈이 큰 성취를 이루지 못함으로써 짧은 한때를 빼고는 평생을 가난과 병으로 고생을 겪어야 했다. 중국의 서북 지역을 유랑하다가 결국 병사했다. 벼슬살이와 달리 문학, 특히 시에서 이룬 성취가 대단하였다. 남긴 시가 1500여 수에 달하며 작품집으로 두공부집(杜工部集)이 있다. 후세 사람들에게 그 자신은 시성(詩聖)으로, 또 그의 시는 시사(詩史)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얻었다.
  • 정회[情懷] 가슴에 사무쳐 오는 정과 회포. 생각하는 정과 회포(懷抱).
  • 구당[瞿塘] 구당협(瞿塘峽)으로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봉절현(奉節縣)과 호북성(湖北省) 의창현(宜昌縣)의 사이에 있는 협곡인데, 양자강(揚子江)이 이곳으로 흐른다. 무협(巫峽), 서릉협(西陵峽)과 함께 장강삼협(長江三峽)이라 불리는데, 장강(長江)의 통로로서 양안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며, 협구(峽口)의 강물 한복판에 염예퇴(灩澦堆)라는 큰 바위가 우뚝 솟아 있고 강바닥이 돌출되어 있어서 물살이 급하기 때문에 배들이 자주 난파되었으며, 역사적으로 군사적 요충지로 꼽혔다.
  • 구당[瞿塘] 협(峽) 이름. 장강삼협(長江三峽) 중 하나. 중국 사천성(四川省) 봉절현(奉節縣) 동쪽 13리 양자강(揚子江) 상류에 있다. 삼협(三峽) 중 가장 짧으나 강폭이 가장 좁고 양안(兩岸)의 절벽이 높이 솟아 있어 강물이 노격(怒激)하고 협구(峽口)의 염예퇴(澧預堆)가 강심에 솟아 있어 뱃길이 매우 험악하다. 험준하기가 삼협(三峽)의 으뜸이라 한다. 전촉(全蜀) 강로(江路)의 문호가 되었다. 벼슬길의 난관에 봉착할 때 이 지명을 흔히 인용하여 비유하곤 한다. 瞿唐(구당)이라고도 한다.
  • 구당[瞿唐] 구당협(瞿塘峽). 장강삼협(長江三峽)의 하나이며 기협(夔峽)으로도 부른다. 서쪽은 중경(重慶)의 봉절현(奉節縣) 백제성(白帝城)에서 시작되고, 동쪽은 무산현(巫山縣) 대계진(大溪鎭)에 이르는데, 길이는 8km로 삼협(三峽) 가운데 가장 짧지만 가장 험준한 곳으로 정평이 난 곳이다. 양자강(揚子江)이 서쪽 히말라야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내려, 사천(四川)을 지나 호북(湖北) 지방으로 들어올 때에 삼협(三峽)의 좁은 협곡을 지나게 된다. 삼협은 중국 여러 하천의 물길 중에서 제일 험한 곳이다. 瞿塘(구당)으로도 쓴다.
  • 구당협[瞿塘峽] 구당협(瞿唐峽)은 물길이 험하기로 유명한 장강삼협(長江三峽) 중의 하나로 중국 사천성(四川省) 봉절현(奉節縣)과 호북성(湖北省) 의창현(宜昌縣) 사이에 있다. 서쪽 봉절현(奉節縣) 백제성(白帝城)에서 시작하여 동쪽 무산현(巫山縣)의 대계(大溪)에 이르는 길이 8킬로미터의 협곡이다. 기협(夔峽)이라고도 하는데 그 까닭은 봉절현의 옛 이름이 기주(夔州)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문(夔門)이라고도 한다. 구당협(瞿唐峽)은 강 양쪽 언덕이 가파르게 높이 치솟은 데다 골짜기 어귀의 강 가운데 염여(灎澦)라는 큰 바위가 서 있어 물살이 세고 몹시 사납기 때문에 이곳을 지나는 배들이 많이 전복된다 한다. 서촉(西蜀)의 관문(關門)이라 칭해진다.
  • 곡강[曲江] 곡강 또는 곡강지(曲江池)라고도 하는데 장안성(長安城) 남쪽(지금은 섬서성陝西省 서안시西安市)에 있었다. 물길이 굽어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진한(秦漢) 시기에 이미 제왕의 유락장소였다. 진시황(秦始皇)이 이곳에 이궁(離宮)을 짓고 의춘원(宜春苑)이라 하였는데, 한(漢)은 이것을 고쳐 낙유원(樂游苑)이라 하였고, 왕망(王莽)은 궁전을 없애고 낙유묘(樂游廟)라는 사당을 세웠다. 수문제(隋文帝)가 곡강(曲江)이란 이름을 싫어하여 이곳에 연못을 파고 부용지(芙蓉池: 부용원芙蓉苑)라 바꾼 것을 당(唐)에 들어 다시 곡강(曲江)으로 바꿨다. 당현종(唐玄宗)에 이르러 가장 큰 규모로 조성되었는데 연못 남쪽에 부용원(芙蓉苑), 행원(杏園), 자운루(紫雲樓), 낙유묘(樂游廟), 자은사(慈恩寺) 등의 명승지(名勝地)가 있었다. 당시 장안성의 독서인들은 항상 이곳에 나와 경치를 즐겼는데, 특히 중화절(中和節: 음력 2월 2일), 상사절(上巳節: 음력 3월 3일) 등 명절 때면 일반 백성들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로 붐볐다고 전한다. 또한, 진사 급제자(進士及第者)를 방방(放榜)하고 나서는 곡강정(曲江亭)에서 그들에게 큰 주연(酒宴)을 베풀었다. 두보(杜甫)가 당 현종(唐玄宗) 천보(天寶) 14년(754) 3월 삼짇날 곡강 가에서 봄놀이하는 미인들을 보고 장편시 여인행(麗人行)을 지었다.
  • 곡강[曲江] 본디 중국 섬서성(陝西省) 서안시(西安市) 남쪽에 있던 유명한 명승지인 곡강지(曲江池)를 이르는데, 연못물이 굽이치는 것이 마치 강물 같아 곡강(曲江)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진대(秦代)에 의춘원(宜春苑)이라 하였고, 한대(漢代)에는 낙유원(樂游原)이라 했다. 수문제(隋文帝)가 ‘曲’자가 들어 있는 것을 싫어하여 부용원(芙蓉園)으로 바꾼 것을 당대(唐代)에 다시 곡강(曲江)으로 불렀다. 당(唐)나라 개원(開元) 연간에 다시 물길을 트고 못을 팠는데 못 주위에 자운루(紫雲樓), 부용원(芙蓉苑), 행원(杏園), 자은사(慈恩寺), 낙유원(樂遊原) 등이 있고 주위 경관이 수려하여 매년 정월 그믐, 삼월 삼짇날, 중양절(重陽節) 등고(登高) 같은 좋은 날에는 행락객이 구름처럼 모였고, 선비들이 과거에 급제하면 또 이곳에서 잔치를 열기도 했다. 당나라 때 대표적인 경승지(景勝地)인데 지금은 메워져 육지가 되었다. 서경잡기(西京雜記)에 “京城龍華寺 南流水屈曲 謂之 曲江 在秦時爲宜春苑 漢爲樂遊苑 開元中鑿池引水 環植花木爲京師勝賞之地”라고 하였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 곡강(曲江)에 “조정에서 퇴근하여 봄옷을 저당 잡히고, 매일 강어귀에서 잔뜩 취해 돌아왔네. 외상 술값은 가는 데마다 깔아 놓았지만, 인생살이 일흔 살 옛날부터 드물다네[朝回日日典春衣, 每日江頭盡醉歸. 酒債尋常行處有, 人生七十古來稀.]”라고 하였다.
  • 강두[江頭] 강 언저리. 강가의 나룻배 타는 곳. 강가의 나루 근처. 강기슭. 강가. 강 언덕.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 애강두(哀江頭)에 “강변의 궁전은 수많은 문 닫았는데, 가는 버들 새 부들 풀은 누굴 위해 푸르른가.[江頭宮殿鎖千門 細柳新蒲爲誰綠]”라고 하였고, 곡강(曲江)에 “퇴청해서는 나날이 봄옷을 전당 잡혀, 날마다 강 머리에서 실컷 취해 돌아오네.[朝回日日典春衣 每日江頭盡醉歸]”라고 하였고, 백거이(白居易)의 시 비파행(琵琶行)에 “심양의 강가 어느 날 밤 객을 전송하는데, 단풍잎 갈대꽃에 갈바람 쓸쓸하였어라.[潯陽江頭夜送客 楓葉荻花秋瑟瑟]”라고 하였다.
  • 풍연[風煙] 풍연(風烟). 바람과 강가에 피어오르는 물안개 등의 풍광(風光). 풍경(風景). 경색(景色). 백거이(白居易)의 화죽가(畫竹歌)에 “아름다운 균분의 자태를 잃지 않았고, 깨끗한 경치의 정취를 죄다 얻었네.[嬋娟不失粉態 蕭颯盡得風煙情]”라고 하였고, 장뢰(張耒)의 시 등해주성루(登海州城樓)에 “나그네 마음 천 리 먼 곳 슬픔 같지 않아서, 난간 밖 풍광마다 모두가 시름일세.[客心不待傷千里 檻外風烟盡是愁]”라고 하였다.
  • 풍연[風烟] 풍연(風煙). 바람과 연기, 또는 운무. 바람과 먼지. 흐릿한 풍경. 멀리 보이는 공중에 서린 흐릿한 기운. 속세 또는 전란(戰亂)을 뜻하기도 한다.
  • 소추[素秋] 가을. 흰빛은 가을에 해당하므로, 가을의 별칭으로 쓰인다. 소(素)는 백(白)과 통한다. 오색(五色)을 오방(五方)에 배치시킬 때, 서쪽은 흰색을 숭상하며 가을은 서쪽에 해당한다.
  • 화악[花萼] 화악(花萼)의 악(萼)은 곧 꽃을 받치고 있는 꽃받침을 말하는데, 꽃과 꽃받침은 본디 한 가지에서 나왔다 해서 형제간의 우애(友愛)를 뜻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상체(常棣)에 “아가위의 꽃이여, 꽃받침이 화사하지 않는가. 무릇 지금 사람들은, 형제만 한 이가 없느니라.[常棣之華 鄂不韡韡 凡今之人 莫如兄弟]”라고 하였는데, 당 현종(唐玄宗)이 일찍이 이 뜻을 취하여 흥경궁(興慶宮) 서남쪽에 화악상휘지루(花萼相輝之樓)를 세우고 여러 아우들과 함께 이 누각에 올라서 서로 즐기며 우애 깊게 지냈다고 한다.
  • 화악루[花蕚樓] 당 현종(唐玄宗)이 흥경궁(興慶宮) 서남쪽에 누대(樓臺)를 짓고, 서쪽의 것은 화악상휘지루(花萼相輝之樓)라 제액(題額)하고 남쪽의 것은 근정무본지루(勤政務本之樓)라 하였다. 현종이 자주 화악상휘지루(花萼相輝之樓)에 올라 형제들과 화락하게 즐겼다고 한다. 화악은 아가위나무의 꽃인데 서로 붙어 있으므로 형제간을 상징한다. 근정무본지루(勤政務本之樓)는 정사에 부지런하고 국가의 근본인 농업을 중시한다는 뜻을 취한 것으로, 연호를 바꾸고 사면령을 내리고 항복을 받고 정사를 처리하는 등의 일을 대부분 이곳에서 행하였다. 제왕(諸王)들이 풍류를 아뢰면 반드시 곧 불러 다락에 오르라 하여 같은 탑(榻)에 앉아 즐기며 황금과 비단을 하사한 고사가 전한다. <舊唐書 卷95 列傳 第45 睿宗諸子 讓皇帝憲傳>
  • 화악루[花萼樓] 본래 이름은 화악상휘루(花萼相輝樓)이다. 당 현종(唐玄宗)이 흥경궁(興慶宮) 서남쪽에 지은 누각으로, 형제들과 때때로 올라 함께 먹고 마시며 이불을 나란히 하고 자기도 하던 곳이다. 화악(花萼)이라는 이름은 시경(詩經) 상체(常棣)의 “아가위꽃이여. 찬란히 빛나지 않는가? 지금 사람 가운데 형제만한 이가 없구나.[常棣之華 鄂不韡韡 凡今之人 莫如兄弟]”라고 한 구절에서 글자를 따온 것이다. 당나라 현종(玄宗)의 형제 다섯 사람이 처음에 낙양 적선방(積善坊)에 집을 짓고 한 담장 안에 살면서 오왕택(五王宅)이라고 하였다가 나중에 장안으로 옮겨서도 흥경방(興慶坊)에 집을 하사받아 역시 오왕택이라고 하였다. 흥경방은 나중에 흥경궁이 되었는데 현종이 흥경궁(興慶宮) 서남쪽에 화악상휘지루(花萼相輝之樓)를 세웠다. 이것을 간략하게 화악루(花萼樓)라고 일컫는다. <舊唐書 卷95 讓皇帝憲列傳>
  • 협성[夾城] 협채(夾寨)라고도 한다. 적의 성(城)을 포위할 목적으로 그 주변에 쌓는 보루(堡壘) 따위를 말한다.
  • 협성[夾城] 협성(夾城)이란 양쪽에 높은 담장이 있는 사잇길을 말한다. 당 현종(唐玄宗) 개원(開元) 20년(732), 대명궁(大明宮)과 흥경궁(興慶宮)의 사이에 협성복도(夾城複道)를 만들었다. 협성복도(夾城複道)는 대명궁(大明宮)에서 통화문(通化門)을 경유하여 흥경궁(興慶宮)으로 이어졌는데, 외부에 이동 정황을 노출하지 않은 채 이를 통해 두 궁을 왕래하며 곡강(曲江)의 부용원(芙蓉園)까지 거둥할 수 있었다. <舊唐書 地理志 關內道><新唐書 地理志 關內道 上都>
  • 통어[通御] 거느리어 제어(制御·制馭)함.
  • 어기[御氣] 감정을 제어하다. 혈기를 억누르다. 바람을 타고 가는 것 혹은 제왕의 기운을 뜻한다.
  • 부용원[芙蓉苑] 당대(唐代)에는 그 이전 왕조에 비해 훨씬 규모가 큰 궁원(宮苑)을 조성했는데, 장안(長安)의 남내원(南內苑), 동내원(東內苑), 부용원(芙蓉苑), 그리고 여산(驪山)의 화청궁(華淸宮)이 있었다. 부용원은 곡강의 서남쪽에 있어서 남원(南苑)이라고도 했는데, 현종이 항상 귀비와 이곳에서 놀았다. 안록산의 반란 소식도 이곳에서 술을 마시다가 들었다고 전해진다.
  • 부용[芙蓉] 원산지가 중국이고, 가을에 희거나 붉은 꽃을 피우는 목부용(木芙蓉)을 가리킨다. 따뜻한 것과 물기를 좋아하며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라지만 가뭄과 추위에 약하다. 삽목으로 번식하는 관상용 낙엽관목으로 관상용이지만 약재로도 쓴다. 거상화(拒霜花)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연꽃을 이르기도 한다.
  • 부용[芙蓉] 아욱과에 속한 낙엽 관목. 높이는 1~3미터로, 잎은 어긋나고, 가지에 짧은 털이 있다. 8~10월에 연한 홍색 꽃이 피며, 열매는 둥글고 털이 있다. 원산지는 중국이며 우리나라에서는 관상용으로 재배한다.
  • 부용[芙蓉] 연(蓮)의 이칭(異稱)이다. 연꽃에 관한 중국의 기록은 시경(詩經) 정풍(鄭風)에 부거(芙蕖)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그후 연을 하(荷)라고 불렀고 별명으로 부용(芙蓉)이라고도 했다. 중국의 가장 오래된 사서(辭書)인 이아(爾雅)에 연(蓮)을 일러 “뿌리는 우(藕)이고, 밑동(本, 수중경)은 밀(蔤)이고, 줄기는 가(茄)이고, 잎은 하(蕸),이고, 꽃은 함담(菡萏)이고, 열매는 연(蓮)이고, 씨는 적(菂)이고 씨[菂]의 한가운데가 의(薏)이며 꽃을 가리키는 함담은 꽃이 피기 전의 봉오리를 지칭하고 꽃이 피고 나면 부용(芙蓉), 부거(芙蕖)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또, 최표(崔豹)의 고금주(古今注)에 “부용은 일명 하화라고 하는데 연못 속에서 살고 열매는 연이라고 하며 꽃 중에 가장 뛰어난 것이다.[芙蓉一名荷華, 生池澤中, 實曰蓮, 花之最秀異者.]”라고 하였다. 참고로, 초사(楚辭) 이소(離騷)에 “깨끗한 연잎으로 저고리를 만들고, 향기로운 연잎 모아 치마 만드네.[製芰荷以爲衣兮 集芙蓉以爲裳]”라고 하였고, 왕유(王維)의 시 망천이십경(輞川二十景) 임호정(臨湖亭)에 “정자에 올라 술잔을 채우고 보니, 연꽃이 사방에 활짝 피었네.[當軒對樽酒, 四面芙蓉開]”라고 하였다.
  • 주렴[珠簾] 구슬이나 구슬 모양(模樣)의 물건(物件)을 꿰어 만든 발.
  • 황곡[黃鵠] 신선이 타고 다닌다는 황색을 띤 대조(大鳥)의 이름인데, 고니의 일종으로 일거에 천 리를 날아간다고 한다. 안사고(顔師古)는 “황곡은 커다란 새로 일거에 천리를 간다.[黃鵠大鳥一擧千里]”라고 하였다. 흔히 속세를 벗어나 은거하는 높은 재주를 가진 고재현사(高才賢士)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회남자(淮南子) 도응훈(道應訓)에 “노오가 북해에 노닐다가 몽곡의 들에 이르러 한 선비가 귀각을 거두어 합리를 파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 노오가 말하기를 ‘부자는 나와 더불어 벗이 되어 주겠소?’라고 하니, 선비가 한탄하기를 ‘나는 바야흐로 남으로 망랑의 들에 노닐고, 북으로 침묵의 고을에 쉬고, 서로 명명의 마을에 닿고, 동으로 홍몽의 빛을 꿰뚫고 있다오.’라 하고는, 몸을 솟구쳐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노오가 쳐다보며 ‘나는 부자에 비하면 고니와 애벌레의 관계와 같다.’라고 하였다.[盧遨遊北海 至蒙轂之上 見一士龜殼而食蛤蜊 遨曰夫子可與遨爲友矣 士歎曰 我方南遊乎罔浪之野 北息乎沈默之鄕 西窮冥冥之里 東貫鴻蒙之光 聳身入雲中 遨仰視曰 吾比夫子 猶黃鵠之與壤蟲]”라고 하였다. 또, 문선(文選) 권33 굴원(屈原)의 복거(卜居)에 “차라리 황곡과 날개를 나란히 할까? 장차 닭이나 오리와 먹이를 다툴까?[寧與黃鵠比翼乎, 將與雞鶩爭食乎.]”라고 하였는데, 유량(劉良)의 주에 “황곡은 일사(逸士)를 비유한다.”라고 하였다. 참고로, 유향(劉向)의 열녀전(列女傳) 노과도영(魯寡陶嬰)에 “춘추시대 때 노나라 도씨문중에 도영이란 딸이 있었는데 젊어서 홀로 되어 어린 아이를 키우며 실을 자아 생계를 삼았다. 어떤 사람이 도영의 의로움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녀를 배필로 삼으며 했다. 그 말을 들은 도영이 ‘황곡의 노래’를 지어 부르며 자신의 뜻을 밝히자 노래를 들은 그 사람이 다시는 그런 맘을 먹지 않았다.[春秋魯陶門之女陶嬰, 少寡, 撫養幼孤, 紡績爲生; 魯人或聞其義, 將求匹. 嬰聞之, 乃作黃鵠之歌以明志. 魯人聞之, 遂不敢復求.]”라고 하였다. 이후 황곡(黃鵠)이 부녀자의 정절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 금람아장[錦纜牙檣] 비단 닻줄과 상아 돛대라는 뜻으로 화려한 유람선(遊覽船)을 가리킨다.
  • 금람[錦纜] 비단으로 장식한 닻줄. 수 양제(隋煬帝)가 일찍이 통제거(通濟渠)를 뚫어 하수(河水)의 연안까지 둑을 쌓아 어도(御道)를 만들고 길 옆에는 버들을 죽 심었으며, 비단 닻줄과 상아(象牙) 돛대로 장식한 배를 타고 놀이를 했던 데서 온 말이다.
  • 아장[牙檣] 상아로 만든 돛대.
  • 진중[秦中] 옛 지명으로 현재 섬서성(陝西省) 중부 평원 지역이다. 즉 관중(關中) 땅을 말하는데,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에 진(秦) 나라의 영토였기 때문에 진중(秦中)이라고도 한다.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처음 촉(蜀)에 봉해졌다가 이곳을 거쳐 나와 천하를 평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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