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길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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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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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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食筍[식순] 죽순을 먹으며

 

- 白居易[백거이] -

 

此州乃竹鄕[차주내죽향] 이 고을은 대나무의 고장이라

春筍滿山谷[춘순만산곡] 봄 죽순이 온 산골에 가득하네

山夫折盈抱[산부절영포] 산 사람이 한 아름 가득 꺾어서

抱來早市鬻[포래조시죽] 안고 나와 새벽 장에서 파네

物以多爲賤[물이다위천] 물건이 흔하면 값이 헐한지라

雙錢易一束[쌍전역일속] 동전 두 닢으로 한 뭇을 사다

置之炊甑中[치지취증중] 밥 짓는 시루에 같이 넣으니

與飯同時熟[여반동시숙] 밥과 더불어 한꺼번에 익었네

紫籜坼故錦[자탁탁고금] 자주 껍질은 묵은 비단 찢은 듯

素肌擘新玉[소기벽신옥] 하얀 속살은 처음 쪼갠 옥인 듯

每日遂加餐[매일수가찬] 매일 이것으로 먹거리 더하니

經時不思肉[경시불사육] 시간 가도 고기 생각이 없네

久爲京洛客[구위경락객] 오랫동안 도성의 나그네 되어

此味常不足[차미상부족] 이 맛을 못 봐 늘 아쉬웠었거늘

且食勿踟躕[차식물지주] 먹을 수 있을 때 망설이지 마시라

南風吹作竹[남풍취작죽] 남풍 불면 대나무 되어 버린다네



백거이[白居易] ()나라 때 시인으로 자는 낙천(樂天),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 또는 취음선생(醉吟先生)이다. 조적(祖籍)은 산서(山西) 태원(太原)이고, 이백(李白)이 죽은 지 10, 두보(杜甫)가 죽은 지 2년 후에 하남(河南) 신정(新鄭)에서 태어났다. 정원(貞元) 16(800)에 진사가 되어, 벼슬은 소주(蘇州항주(杭州)의 자사를 거쳐 만년에 태자소부(太子少傅)에 지냈고, 형부상서(刑部尙書)로 치사(致仕)하였다. 향산(香山)에서 지내다가 세상을 뜬 뒤 낙양(洛陽) 남쪽 향산의 비파봉(琵琶峰)에 묻혔다. 시호는 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백부(白傅) 또는 백문공(白文公)으로 불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5세 때부터 시 짓는 법을 배웠으며 15세가 지나자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는 시재를 보였다 한다. 이백(李白), 두보(杜甫)와 더불어 당대3대시인(唐代三大詩人)으로, 같은 시대의 한유(韓愈)와 더불어 이두한백(李杜韓白)으로 병칭된다. 원진(元稹)과는 함께 신악부운동(新樂府運動)을 이끌어 원백(元白)으로, 유우석(劉禹錫)과는 유백(劉白)으로 병칭되며 당시 으뜸으로 쳤다. 백거이는 시의 제재가 광범위하고 형식이 다양하며 언어가 평이하고 통속적이어서 시마(詩魔) 또는 시왕(詩王) 등의 칭호를 얻었다. 그는 시론을 통해 자신의 시작의 첫째 목적은 겸제(兼濟)의 뜻을 살린 풍유(諷諭)에 있다고 현실주의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고, 스스로 자신의 시집을 편집하면서 시를 풍유시(諷諭詩), 한적시(閑寂詩), 감상시(感傷詩), 잡률(雜律詩)의 네 종류로 분류하였다. 만년에는 세상일에 대하여 고민하고 방황한 끝에 한적을 좋아하는 태도로 발전한다. 저서에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백씨육첩사류(白氏六帖事類) 등이 전한다. 장한가(長恨歌), 매탄옹(賣炭翁), 비파행(琵琶行) 등을 대표적인 시로 꼽는다.

경락[京洛] 낙양(洛陽)의 별칭으로, 널리 서울을 가리킴. 동주(東周)와 동한(東漢)이 이곳을 도읍으로 정해 붙여진 이름이다. 도성(都城)을 가리키기도 한다. 도읍(都邑).

지주[踟躕] 망설이다. 주저하다. 일을 딱 잘라서 하지 못하고 머뭇거림 망설임. 머무적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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