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길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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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

종이책전자책

 

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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訪含曦上人[방함희상인] 함희상인을 찾아가다

 

- 盧仝[노동] -

 

三入寺[삼입사] 세 번 절을 찾았으나

曦未來[희미래] 희상인은 오지 않아

轆轤無人井百尺[녹로무인정백척] 퍼 올릴 사람 없는 백 척 우물에

渴心歸去生塵埃[갈심귀거생진애] 돌아가는 마른 마음 먼지가 이네

 


노동[盧仝] () 나라 때의 시인으로 고향은 범양(范陽: 지금의 하북河北 탁현涿縣)이지만 하남성(河南省) 제원시(濟源市) 무산진(武山鎭)에서 초당사걸(初唐四傑) 중 한 사람인 노조린(盧照隣)의 적계자손으로 태어났다. 차를 좋아하여 다치(茶痴)라는 호를 썼고 옥천선자(玉川仙子)라는 자호도 썼다. 집안이 가난하여 어려서부터 소실산(少室山)에 은거하여 독서에 힘쓰면서 시()와 문장을 가다듬었지만 벼슬길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강직한 성격이 맹교(孟郊)를 닮은 듯하면서도 호웅(豪雄)의 기질을 잃지 않아 한맹시파(韓孟詩派)의 중요한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월식시(月蝕詩)로 조정과 권신들의 전횡을 풍자했고, 이 작품으로 권세가들의 미움을 샀다. () 문종(文宗) 때 황권 회복을 위한 환관 숙청이 실패로 돌아간 감로지변(甘露之變)을 거치면서 환관 구사량(仇士良)에 의해 살해된 문무백관이 천여 명에 이르렀는데, 이때 재상 왕애(王涯)의 집에 머물던 노동도 함께 변을 당했다. 한유(韓愈)가 노동의 월식(月蝕) 시를 칭찬하여 지은 시에서 낙성에 살고 있는 옥천 선생은, 허물어진 집 두어 칸이 있을 뿐이네.[玉川先生洛城裏, 破屋數間而已矣.]”라고 하였다. 옥천자시집(玉川子詩集)이 남아 전한다.

노동[盧仝] ()나라 제원(濟源) 사람으로 소실산(少室山)에 은거하여 옥천자(玉川子)라고 자호(自號)하였다. 박학하고 시에 뛰어났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었다. 조정에서 간의대부(諫議大夫)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 마시기를 좋아하고 차의 품평(品評)을 잘했으며 칠완다가(七碗茶歌)로 유명하다. 한유(韓愈)의 시 기노동(寄盧仝)옥천 선생은 낙양성 안에 사는데, 가진 거라곤 낡은 집 두어 칸뿐이라네. 하나인 남자 종은 긴 수염에 머리도 못 싸매고, 하나인 여자 종은 맨다리에 늙어서 이도 없네.[玉川先生洛陽裏 破屋數間而已矣 一奴長鬚不裹頭 一婢赤脚老無齒]”라고 하였다. 일찍이 월식시(月蝕詩)를 지어 원화(元和) 연간의 역당(逆黨)을 풍자하였다. 한유(韓愈)가 그 시를 사랑하여 후하게 대우하였고 그 시를 모방하여 월식시를 지었다. <唐書 176>

상인[上人] 승려에 대한 존칭. 불가(佛家)에서 안으로는 덕과 지혜를 지니고 밖으로는 훌륭한 행실이 있는 사람으로, 고승(高僧)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상인[上人] 석씨요람(釋氏要覽) 칭위(稱謂)안으로는 복덕과 지혜를 갖추고 밖으로는 빼어난 계행(戒行)을 갖춰 사람들 위에 있으므로 상인(上人)이라 하였다.[內有德智, 外有勝行, 在人之上, 名上人.]”라고 하였다.

녹로[轆轤] 녹로는 도르래나 활차(滑車)를 말한다. 장적(張籍)의 초비원(楚妃怨)오동잎이 황금정의 우물에 질 때, 가로지른 녹로에 단 두레박줄 당기누나.[梧桐葉下黃金井 橫架轆轤牽素綆]”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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