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길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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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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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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飮酒二十首[其十一]음주2011 / 죽으면 사라지는 몸

 

- 陶淵明[도연명] -

 

顔生稱爲仁[안생칭위인] 안회는 인을 행하였다 일컬어졌고

榮公言有道[영공언유도] 영계기는 도리를 지녔다 말하지만

屢空不獲年[누공불획년] 궁핍하게 천수도 누리지 못했거나

長飢至於老[장기지어로] 오래도록 굶주리며 노경에 이르렀네

雖留身後名[수류신후명] 비록 죽은 후에 이름은 남겼다지만

一生亦枯槁[일생역고고] 일생을 팍팍하게 살았을 뿐이라네

死去何所知[사거하소지] 죽고 난 뒤에야 알바가 무엇이랴

稱心固爲好[칭심고위호] 마음이 흡족한 것이 좋은 것이라네

客養千金軀[객양천금구] 쓸데없이 천금인 듯 몸을 보양하나

臨化消其寶[임화소기보] 죽어지면 그 보배 사라져버린다네

裸葬何必惡[나장하필오] 맨 몸으로 묻힘을 어찌 꼭 싫어하랴

人當解意表[인당해의표] 사람은 뜻밖의 뜻 헤아려야 마땅하리

 

幷序병서 : 나는 한가롭게 살아 기뻐할 일이 적은데다 근래에는 밤마저 길어지는 차에, 우연찮게 좋은 술을 얻게 되어 저녁마다 술을 마시지 않은 적이 없다. 그림자를 돌아보며 홀로 잔을 비우고 홀연히 취하곤 하는데, 취한 후에는 언제나 시 몇 구를 적어 스스로 즐겼다. 붓으로 종이에 적은 것이 꽤 되어, 말에 조리도 두서도 없지만 애오라지 친구에게 쓰게 하여 이로써 즐거운 웃음거리로 삼고자 한다[余閒居寡歡, 兼比夜已長, 偶有名酒, 無夕不飮. 顧影獨盡, 忽焉復醉. 旣醉之後, 輒題數句自娛. 紙墨遂多, 辭無詮次, 聊命故人書之, 以爲歡笑爾.] <飮酒二十首 幷序>

 


도연명[陶淵明] 도잠(陶潛). 동진(東晉) 말기부터 남조(南朝) (:유송劉宋) 초기 사람이다. 시인이자 문학가로 청신하고 자연스러운 시문으로 시명을 얻었다. 강주(江州) 심양(尋陽) 시상(柴桑)에서 태어났다. 자는 원량(元亮)이다. ()나라에 와서 이름을 잠()으로 바꾸었다. 일설에는 연명(淵明)이 그의 자()라고도 한다. 증조부 도간(陶侃)은 동진(東晉)의 개국공신으로 관직이 대사마에 이르렀으며, 조부 도무(陶茂)와 부친 도일(陶逸)도 태수를 지냈다. 29세 때에 벼슬길에 올라 주()의 좨주(祭酒)가 되었지만, 얼마 안 가서 사임하였다. 그 후 생활을 위하여 진군참군(鎭軍參軍건위참군(建衛參軍)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항상 전원생활을 동경한 그는 팽택현령(彭澤縣令)이 되었으나 80여 일 만에 벼슬을 버리고, 41세에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으며 전원으로 돌아와 문 앞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고 스스로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칭하였다. 고향에 은거한 뒤에 다시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63세에 세상을 떴다. 그의 사후에 평소 그와 가깝게 지냈던 이들이 그에게 정절선생(靖節先生}이란 시호를 주어 불렀다. ()나라 종영(鍾嶸)의 시품(詩品)고금의 은일시인 가운데 첫머리[古今隱逸詩人之宗]”라 평가했을 만큼 그의 시풍이 중국문학사에 남긴 영향이 매우 크다. 주요 작품으로 음주(飮酒귀원전거(歸園田居도화원기(桃花源記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귀거래사(歸去來辭) 등이 있다. 도연명이 직접 지은 만사는 고금사문유취(古今事文類聚)에 의만가사(擬挽歌辭)라는 제목으로 3수가 실려 있다.

안회[顔回] 춘추(春秋)시대 노()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회(), 자는 자연(子淵), 주로 안연(顔淵)으로 부른다. 가난하였으나 학문을 좋아하였고, 덕행(德行)으로 이름 높아 공문사과(孔門四科)의 덕행(德行)에 으뜸으로 일컬어진다. 공자 다음가는 성인으로 받들어져 안자(顔子)라고 높여 부르기도 한다. 공자(孔子)가 가장 아꼈던 제자로 일찍 요절하였다. 공자가어(孔子家語) 제자해(弟子解)안회(顔回)29세에 머리가 세었고, 31세로 일찍 죽었다.”라고 하였다. 공자가 일찍이 안회라는 자가 학문을 좋아하여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으며 잘못을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았는데, 불행하게도 명이 짧아 죽었다[有顔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라고 하고, 어질다, 안회여.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마실 것으로 누추한 시골에 사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변치 않으니, 어질다, 안회여[賢哉, 回也! 一簞食·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 回也!]”라고 하는 등, 안연(顔淵)의 덕을 칭찬하고 그의 요절을 매우 애통해하였다. <論語 雍也>

영공[榮公] 영계기(榮啓期)를 말한다. 영계기는 춘추 시대의 공자와 동시대에 산 현인이다.

영계기[榮啓期] 영계기는 춘추 시대의 공자(孔子)와 동시대에 산 현인이다. 열자(列子) 1편 천서(天瑞)어느 날 공자가 노나라 태산에 유람하러 가다가, 영계기가 성읍의 들을 거닐며 사슴가죽으로 만든 옷에 새끼줄을 허리에 두르고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그에게 물었다. ‘선생께서 즐거워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계기가 말하였다. ‘나의 즐거움은 아주 많습니다. 하늘이 낸 만물 중에 사람이 가장 귀한 존재인데 내가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이것이 첫째의 즐거움이고, 사람은 남녀를 차별하여 남자는 높이고 여자를 낮추는데 내가 남자로 태어났으니 이것이 두 번째 즐거움입니다. 또한 사람으로 태어나서 빛나는 해와 달을 보지도 못하고 강보에 싸여 죽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이미 올해 나이 구십이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세 번째 즐거움입니다. 가난하게 사는 것은 도를 닦는 선비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일이고, 죽음이란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당연한 종말입니다. 이제 나는 사람에게 당연히 닥치는 일에 처하여 내 명대로 살다가 죽게 되니 내가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이에 공자가 참으로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선생님이야말로 느긋하고 편안한 마음을 지닌 분이십니다.’라고 하였다[孔子遊於太山, 見榮啓期行乎郕之野, 鹿裘帶索, 鼓琴而歌. 孔子問曰: 先生所以樂, 何也?’ 對曰: 吾樂甚多. 天生萬物, 唯人爲貴. 而吾得爲人, 是一樂也. 男女之別, 男尊女卑, 故以男爲貴, 吾旣得爲男矣, 是二樂也. 人生有不見日月不免襁褓者, 吾旣已行年九十矣, 是三樂也. 貧者士之常也, 死者人之終也, 處常得終, 當何憂哉? 孔子曰: 善乎? 能自寬者也.]”는 영계기(榮啓期)와 공자(孔子)의 이야기가 나온다. 공자가어(孔子家語) 육본편(六本篇)에도 비슷한 내용이 전한다.

누공[屢空] 쌀독이 자주 빈다는 말로 살림살이가 빈궁한 것을 말한다.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공자가 한 그릇 밥과 한 주발 국으로 누추한 곳에서 사는 고생을 다른 사람은 감내하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렇게 사는 낙을 고치지 않았다[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라고 하였고, 논어(論語) 선진(先進)안회는 도()에는 거의 이르렀으나, 양식이 자주 떨어졌다[回也, 其庶乎, 屢空.]”라고 하였다. 후에는 안빈낙도의 대명사로 쓰였다. <論語 先進>

고고[枯槁] 초목(草木)이 말라 물기가 없음. 야위어서 파리함. 초목이 바짝 마른 듯함. (얼굴이) 초췌하다. 파리하다.

소지[所知] (배워서) 아는 바(). 잘 아는 사람. 지인(知人).

칭심[稱心] 마음에 맞다. 만족하다. 흡족한 마음.

나장[裸葬] 장사(葬事) 지낼 때 송장을 관()에 넣지 않고 묻음. 관은 묻지 아니하고 시체만 땅에 묻음. 시체를 알몸인 채로 관에 넣어 장사지내다.

나장[裸葬] 나장은 수의(壽衣)를 입히지 않고 장사 지내는 것을 말한다. 한나라 때 사람인 양왕손(楊王孫)이 황로학(黃老學)에 심취한 데다 당시의 후장(厚葬)하는 세태를 바로잡으려는 마음에서, 병들어 죽기 전에 아들에게 유언하기를 나는 벌거벗은 몸으로 땅속에 들어가 자연의 도를 따르려 하니 내 뜻을 어기지 마라. 죽으면 포대로 시신을 감싸서 일곱 자 땅 밑에 집어넣은 뒤 곧바로 발 있는 부분부터 포대를 꺼내 직접 살이 땅에 닿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漢書 卷67 楊王孫傳>

의표[意表] 의사(意思) . 예상(豫想) . 생각 밖. 전혀 미리 생각하지 않았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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