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길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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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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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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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공[梁公] 당 나라 무후(武后)가 당실(唐室) 이씨(李氏)를 제거하고 무씨(武氏)의 종묘(宗廟)를 세웠는데 적인걸(狄仁傑)의 무리가 중종(中宗)을 받들어 반정(反正)하여 당실(唐室)을 회복시켰다. 적인걸을 양공(梁公)에 봉하였다.

양공[梁公] 양국공(梁國公)에 봉해진 당 나라의 적인걸(狄仁傑)을 가리킨다. 적인걸이 강남 순무사(江南巡撫使)가 되었을 때 오초(吳楚) 지방에 음사(淫祠)가 몹시 많았는데, 17백 곳의 음사를 철거하였다. <舊唐書 卷89 狄仁傑列傳>

양공[楊公] 명 나라 양조(楊照)를 가리킨다. 양조는 가정(嘉靖) 연간에 여러 차례 무공을 세워 요동 총병관(遼東總兵官)이 되어 호적(胡賊)을 막기 위해 축도(築道)를 쌓았다.

양공[羊公] 양공은 진 무제(晉武帝)의 신하 양호(羊祜)를 말한다. 양호는 경치가 좋은 현산을 사랑하여 언제나 이 산에서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내가 죽어서 혼백(魂魄)이 있으면 응당 이 산에 오를 것이다.”라 하였다. <晉書 卷三十四 羊祜傳> 남조(南朝) 때 송()의 포조(鮑照)는 무학부(舞鶴賦)를 지었는데, 그 부에 양호의 전신(前身)이 우물 속에 빠져 죽었다.”라고 하였다.

양공종옥[楊公種玉] 양공은 한() 나라 때의 효자인 옹백(雍伯)을 가리킨다. 옹백은 낙양(洛陽) 사람으로 무종산(無終山), 즉 옥전(玉田)에서 살았는데, 어떤 사람이 돌 한 되를 주면서 땅에 심게 하였다. 몇 년 뒤에 서씨(徐氏) 집에 딸이 있어서 옹백이 장가들고자 하였는데, 그 집에서 백옥 한 쌍을 폐백으로 바치라고 하였다. 이에 옹백이 돌을 심었던 밭에 가서 다섯 쌍의 백옥 구슬을 캐서 바치니 서공이 딸을 주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에 구름 속에서 용이 내려와 이들 부부를 맞이해 하늘로 올라갔으므로 그 후손들이 밭 가운데 비석을 세워 그 일을 기록하였다.

양공천읍인[楊公薦邑人] 한 무제가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허부(子虛賦)를 읽다가 짐이 이 부를 지은 사람과 한 시대에 나지 못하였다.”고 아쉬워하자 옆에 있던 양득의(楊得意)그 부는 바로 신의 고향 사람 상여가 지었다.”고 대답하니 무제가 흠칫 놀라며 상여를 불러 사실을 알고 나서 다시 상림부(上林賦)를 짓도록 하였다. <史記 司馬相如傳>

양공탄설[羊公炭屑] 양공은 양수(羊琇)를 말한다. 진서(晉書) 39양수는 경헌황후(景獻皇后)의 종제(從弟)로 성품이 매우 사치스러웠는데, 당시 낙양(洛陽)에 숲이 적어 숯이 곡식처럼 귀하였으나 수()는 숯가루를 만들어 이것으로 짐승의 모양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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